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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성의 라합처럼(10월 22일 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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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민경용강도사 작성일2004-10-21

본문

제목> 여리고 성의 라합처럼
성경> 수2:1-14
찬송> 207, 258

  여리고 성이 어떤 성입니까? 여리고 성은 일반적으로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여리고 성은 위치 자체가 요새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고학으로 발굴이 된 결과 높이 10미터, 두께 11미터의 견고한 성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성이 가나안의 길목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여리고를 무너뜨리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여리고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가나안은 한 발짝도 들여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성 안에 라합이라는 여인이 살았는데 성경이 그녀에 대한 소개를 할 때 그냥 라합이라고 말하지 않고 ‘라합이라고 하는 기생’(1)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문이 라합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저주와 멸망의 운명에서 최대의 영광의 가문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은 라합을 통하여 예수님의 족보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건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신약성경 히11:3절에는 이 라합의 믿음에 대해 말하기를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우리는 오늘 라합이라는 한 이방인 여인이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이 사건을 통하여 전도자와 전도대상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먼저, 예비 된 영혼이 있다는 것입니다.(1)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보면 정탐을 하다가 누군가에 의해 신고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급하게 숨어들어간다고 간 곳이 라합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서 자신들이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리고가 어떤 곳입니까? 이제 곧 멸망당할 성 아닙니까? 정탐꾼들은 여기에도 하나님의 준비해 두신 사람이 있는 것을 알고 놀랐을 것입니다.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들로 인해 자신들이 살게 되었으니 더욱 감격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라합을 만남으로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라합에게 구원을 약속합니다.
  여러분, 생각지 않은 곳에 주님의 백성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나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그곳에 주님이 나를 만나라고 예비해 두신 영혼이 있습니다. 그는 내가 아니면 구원의 길을 알 수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라합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금번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멸망당할 성 안에 구원받아야 할 자 라합을 찾으라고 우리를 정탐꾼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까? 가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면 있고 안 가면 없는 것’입니다. 가기만 하면 그곳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 영혼을 만날 때 그는 나로 인해 구원의 길로 들어서고 나는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비 된 영혼을 만났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빌립보에서 루디아를, 심지어 감옥에서도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며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순종하며 가니 고넬료가 그의 일가친척까지 모아 두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빌립집사가 순종하고 가니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길에서 이디오피아의 내시가 성경을 가르쳐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면 있습니다. 그러나 안 가면 없습니다. ”

☞구역원들 가운데 믿고 가서 전할 때 예비 된 영혼을 만난 사람이 있으면 나누어봅시다.

2. 소문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그녀는 어떻게 해서 예비 된 영혼이 되었습니까?
라합은 무슨 마음으로 정탐꾼들을 영접하였습니까? 여리고 왕과 정탐꾼 중에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합니까? 당연히 여리고 왕이지요. 정탐꾼은 지금 쫓겨 다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강하다고 해도 여리고 성은 다른 성과는 또 달랐습니다. 문을 딱 걸어 잠그고 세월만 보내면 여리고의 승리는 불을 보는 듯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라합이 정탐꾼을 더 크게 보았을까요? 사실 라합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녀의 마음속에 여호와 신앙이 들어갔을까요? 9-11절에,  “……들었음이라(10절하) 우리가 듣자(11절)……”

라합은 소문을 통하여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들의 신이 있는데 그 신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하고, 그 여호와 하나님이 출애굽 시에 홍해를 마르게 했다는 40년 전의 사건도 들었고 주변의 강력한 부족 왕 시혼과 옥을 전멸시킨 일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그 마음속에는 진짜 신이 누구인가에 대해 결론을 내렸습니다. 1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라”
  소문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라합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듣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문을 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예수 소문이 나야합니다. 인생의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소문은 그들의 새 소망이 되어집니다.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은 가진 것 다 허비하고 난 뒤에 예수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소경이요 거지였던 바디메오는 예수의 소문을 이미 듣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가 예수님의 행차가 있을 때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통하여 예수의 소문이 나야합니다. 소문을 내 놓으면 평소에는 관심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가 심각해질 때에 그 들었던 소문은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예수 소문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소문에 대해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3. 가족, 일가, 친척 친지들의 영혼을 위해(12-13)
그런데 라합은 단지 자신이 구원받는 것 한 가지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원의 길이 열리자 당장 자신 주위의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12,13 -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성경에 보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할 때, 단지 한 사람의 영혼 구원의 차원에서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구원이 가족적이고, 민족적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셨을 때에도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시행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집안 모든 사람에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행16:31에도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 다른 민족들과 달리 대단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에는 애착도 많고 욕심이 많은데 가장 중요한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관대합니다. “이번에 아니면 다음에 하지, 금년이 아니면 내년에 하지” “언젠가는 믿겠지”합니다. 이들의 영혼을 위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어려운 시대에 해야 할 고민이 많은데 교회에서까지 전도로 부담을 주니 참으로 못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붙잡고 고민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고민, 그것은 해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한 문제가 해결이 되면 그 다음 문제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할 만한 고민으로 고민합시다. 고후7:10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는 때로는 부담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부담은 거룩한 부담입니다. 어떤 교회에 이런 표어가 붙어 있었습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앉아서 성경보고, 일어서서 전도하자”
여러분 다시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시고 나가서 다시 전도합시다.

☞믿음으로 하나 되지 못한 가정과 낙심한 가족들, 그리고 이미 작정된 영혼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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