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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의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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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성경강도사 작성일2002-11-13

본문

구역예배(인도자용)
제목> 집안의 탕자
성경> 눅15:25-32
찬송> 93, 269장


눅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타납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비유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은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중에 후반부입니다. 전반부의 내용은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아버지 내게 돌아올 유산을 주십시오. 독립하겠습니다.”몇 번이고 만류했을 아버지가 아들의 덩살에 못이겨 분깃을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했고 얼마 후에 가진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거지 신세가 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빌어먹기 쉽지 않아 돼지에게 주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했으나 그것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잘못을 깨달은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돌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벌 받을 각오를 했고, 혹 아버지가 집에 들이지 않고 내치면 종으로라도 써 달라고 애원할 작정이었습니다. 이게 왠 일입니까?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아버지가 달려와서 자신을 품에 안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전에 집에 있을 때보다 더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때,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1. 종일토록 일하다가 돌아온 큰 아들이 보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28절)
▶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 큰 아들이 밭에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에서 들려오는 풍악 소리를 들었습니다. 종을 불러 알아보니 집을 나갔던 동생이 돌아와 잔치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동생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큰 아들이 화를 내고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도무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도 듣지 않고 망나니처럼 행동한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밑에서 충실히 일하고 뼈 빠지도록 수고한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준 적이 없었던 것을 생각하며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들어오니 집 안에 있던 아들이 들어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소식이 아버지께 들어갔습니다. 작은 아들의 문제가 해결되나 싶더니 이제 큰 아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이래저래 늘 근심입니다. 아버지를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아버지의 근심이 된다는 면에서는 큰 아들도 탕자였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탕자라면, 큰 아들은 집 안에 있었던 탕자였습니다.


2. 그러면 큰 아들은 어떤 면에서 탕자였습니까? (20절)
▶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 먼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관심에 그는 철저하게 무관심하였습니다. 지금 아버지는 집을 나간 둘째 때문에 가슴을 앓고 날마다 동구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왜 동구 밖에 나가는 지를 알면서도 외면해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둘째를 생각하면서 내쉬는 한숨을 보면서 그는 무관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비유의 아버지를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이미 앞선 비유에서 말했듯이 ‘잃은 자에 대한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잃어버린 자녀들을 간절하게 찾고 계십니다.“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4절).“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8절). 아버지가 이처럼 간곡하게 잃은 자에 대한 관심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집 안의 탕자(큰 아들)는 아버지의 관심을 외면해 버립니다. 집에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아버지의 심정을 알지 못하면 탕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장산2002 점프400비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비전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그 간절한 비전에 무관심한다면 역시 이 시대 탕자입니다.


3. 큰 아들의 무관심은 어느 수준까지 이르고 있습니까? (27절)
▶ 집안 사람에 대한 무관심

※ 본문은 자신의 동생에게 조차 무관심한 냉정한 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동일한 상황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가족의 영혼에 대한 무관심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어찌 혈육의 정을 나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가 이 육신의 정을 가지고 천국에서 생활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땅에 있을 때에 우리가 가장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의 가족입니다. 눈에 띄는 한 구절이 있습니다.“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27절)입니다. 아버지는 이 둘째 아들을 평소에 잘 알고 있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성공하고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나 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이 녀석이 몸까지도 상해서 돌아오면 안되는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4. 큰 아들이 왜 집 안의 탕자가 되었습니까? (31절)
▶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큰 아들은 아버지의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고 종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에 천국 열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고백하니 주님은 천국 열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필요할 때마다 천국 열쇠를 가지고 주님의 창고를 열어 가져가는 것입니다.“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큰 아들의 불만이 어디부터 시작되었습니까? 동생은 제 몫을 챙겼는데, 자신을 아직 챙기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는 자기의 몫이 돌아오려면 아버지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재산에 마음이 있는 이상, 그는 불효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아버지의 것이 다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주 풍족한 삶을 살아야 했음에도 그는 아들이 아니라 종처럼 살았습니다. 그의 열심과 충성은 아들의 열심과 충성이 아니라 종의 열심과 충성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위해 염소 새끼 잔치라도 베푼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자신 스스로 잔치를 벌일 수 있었습니다. 이번‘장산 2002 점프 400 비젼’을 위해 열심히 하십시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전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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