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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05 주일요약설교 "한 걸음 또 한 걸음 따라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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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7-11-10

본문

제목> 한 걸음 또 한 걸음 따라 가겠습니다.

성경> 창세기 12:1-5

찬송> 14, 회중찬양, 430

 

선택과 결정의 인생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은 선택 혹은 결정해야 하는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정과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그리스도인들 역시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선택하고 결정할 때 그 기준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고 하면 삶의 기쁨도 없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자주 내 뜻과 맞지 않습니다. 그럴 때 갈등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 뜻을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우기며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안 해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많이 실망합니다. 믿음도 흔들립니다. 이보다 좀 더 믿음이 있는 사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테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해야 할 것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여주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고향에 살고 있는 아브람(나중 이름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가나안까지 가게 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람을 처음 불러내실 때 무엇이라 말씀하셨고 아브람은 그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를 좀 더 정확하게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어떻게 시작하게 하셨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먼 미래의 정확한 꿈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내게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지 가나안으로 가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라 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 결과를 아는 우리들이 하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목적지 없이 아브람을 불러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나안을 생각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랬기에 5절 말씀처럼 아브람을 마침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처음 자신의 고향을 떠날 때, 가나안이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야할 땅을 보여주겠으니 떠나라고 하니 떠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하지만 꿈은 있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떠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꿈이 아브람에게는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이 민족은 복의 근원이 되는 민족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아브람은 이 말씀 하나를 믿고 의지하고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길을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일반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잘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아시고, 현재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의 미래까지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게 될지를, 어디에서 살게 될지를,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를 미리 다 알려주시고 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2. (그러면) 우리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따라 가야합니다.

왜 갑니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갑니까? 순종하며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가라는 곳까지만 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 일반적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고, 어떤 때는 떠나야 할 환경이 조성이 됩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야할지 잘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땐 일단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아브람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습니다. 가나안으로 가는 것 아닙니다. 최종 목적지는 몰랐습니다. 아마 그때 아브람에게는 가야할 곳이라고 생각된 곳이 있었을 겁니다. 그곳으로 간 것입니다. 그곳에 가서 보니 다음에 갈 곳이 보였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가나안에 가기까지 분명하게 들렀던 한 장소가 나옵니다. 어딥니까? 4절에 보면, ‘하란이라는 곳입니다. 이곳 하란에서 그는 마지막 목적지 가나안을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7:4에 보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7:4)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마지막 종착지가 가나안이구나!’ 하고 확신하고 갔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나안에 가서도 이전처럼 또 옮겨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거기 가서야 바로 여기가 하나님이 처음 부르실 때 보여주신다고 했던 바로 그곳이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자세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이 무엇인지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걸으면 됩니다. 그분과 함께 걷기만 하면 그 분의 인도하시는 대로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한 걸음 또 한 걸음

요셉의 꿈이 애굽의 총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형들의 볏단이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꾼 것 뿐이었습니다. 요셉은 이후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다가 또 억울하게 누명을 덮어쓰고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힙니다. 감옥에서 만난 고위관리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석방을 기대했지만 그는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창39장에 요셉의 삶에 대한 특징적인 기록이 나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입니다. , 그는 낙망하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에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 결과 어느 날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총리가 된 것이 그의 꿈의 실현이 아닙니다. 총리로서 나라를 다스리던 어느 날, 자신의 발아래 엎드려 양식을 구하는 형들을 보는 순간에 그 어릴 때 자신이 꾸었던 꿈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찾기 어려운 길도 그 길을 아는 사람과 함께 가면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함께 가면 됩니다. 그 길의 끝이 어디인지 몰라도 그렇게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의 인생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주후 20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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