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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주일설교요약 "성찬에 참여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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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6-04-27

본문

제목> 성찬에 참여하는 자세
성경> 고린도전서 11:27-34
찬송> 78, 회중찬양,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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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애찬과 성찬
은혜로운 성찬식은 예식의 분위기난 순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성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선입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기 직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가지셨던 성만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예식 중에 식사하는 순서를 통해서 첫 성찬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예식에는 식사를 하는 순서가 여러 번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초대교회의 성찬은 애찬과 성찬은 뚜렷하게 구분이 되어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찬이 유대인의 예식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먼저 애찬을 가졌다가 마지막 결론으로 성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애찬과 성찬은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애찬을 말하는 듯하면서 결국 성찬을 말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애찬이 무엇입니까? 유월절에 먹는 식사였고 초대교회에서는 사랑의 식사라고 성도들이 각자 자기의 음식을 해 와서 함께 먹는 공동식사였습니다. 그러면 성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예수님이 직접 하셨던 것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성찬은 애찬의 결론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애찬은 무엇입니까? 목장모임에서 우리가 함께 나누는 식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에서 혼자 밥을 먹거나 가족끼리만 밥을 먹는 것을 애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여서 신앙고백적인 식사를 할 때에 일컫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목장에서 먹는 애찬이 성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바울이 성찬이라고 볼 수 없는 애찬의 행위에 대해서 지적하듯이... 점점 더 세월이 가면서 애찬의 의미만 커지고 주님의 성찬의 의미는 약해져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성찬을 구분하기 위해 애찬과 구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교회가 더욱 제도적인 체계가 생기면서 성찬을 성스럽게 관리하기 위해 이 성찬은 구분된 사람들의 통제 하에 질서 있게 행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
현재는 각 교단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그것을 목사의 관할 하에 집행하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게 떡과 잔에 참여하는 사람(27)
본문 27절에서 바울은 성찬에 참여하기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인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몸이 아프고 병들고 죽게 되는 것까지 성찬에 어떻게 임하느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30-32)
내가 성찬에 합당한 모습으로 참여하지 않음으로 죄를 먹고 마시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까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그것으로 몸이 아플지 모른다. 성찬으로 내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만 역으로, 내가 합당하게 이 성찬에 참여하면 나의 병든 몸이 낫게 되고 죽어가는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성찬이 목적이 신유와 치유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부가된 하나님의 역사를 바울은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그런 일을 충분히 기대하고 사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로 성찬에 임해야 하겠습니까?
 

1. 구원의 확신과 감사의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첫 번째 성찬에서 예수님은 곧 있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제자들은 이 말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2천년의 세월이 지난 우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가 제자들과 함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생각하면서 성찬식에 참여하면 됩니다. 주님은 떡을 가지시더니 축사하고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다 말씀하시고는 떼서 나에게 주십니다. 이어서 잔을 드시더니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잔을 돌리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에 임할 때마다 나의 죄 때문에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려주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찢기신 몸과 그의 흘리신 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었음을 감사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2. 한 지체됨을 고백함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성경 본문에서 바울이 가장 중요하게 지적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29절에서 바울은 특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29)를 말하는데 여기의 주의 몸은 곧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성찬에 참여한 자를 말합니다.
교회의 하나 됨을 깬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 애찬 시간이었을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배고픈 다른 형제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배만 먼저 채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술에 취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교회는 교회에서 먹는 애찬을 정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제대로 먹지 못하는 종의 계층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요지는 이런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사람이다.’
애찬에서도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찬의 의미를 알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 된 형제입니다. 하지만 형제라 할지라도 자동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3. 복음을 전하는 증인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마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24-25절에서 주님을 기념하라고 한 후에 26절에서 강조하기를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라 했습니다.
우리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에,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소원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 찬송, 교육, 구제, 교제... 하지만 교회를 세우기 위해 파송된 제자들에게 주님이 무엇을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면 핵심이 정리됩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20:18-19)
 

주님 내가 증인의 삶을 살겠습니다. 어떻게든지 복음과 관련된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직접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보내는 선교사가 되겠습니다.
내 주위에 주님이 급하게 부르는 사람이 있는지 항상 관심을 눈을 가지고 살겠습니다. 주님이 그런 사람을 보게 하시면 그에게 다가가서 섬기겠습니다. 그의 마음이 열리면 인도하겠습니다. 그렇게도 못하면 인도되어 온 사람을 성심으로 섬기겠습니다.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운전해 주겠습니다. 그들의 아이를 담당해 주겠습니다....어떻게 해서든지 복음과 관련된 삶을 살겠습니다.
 

이것을 떡과 잔을 받으면서 다시 한 번 더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성찬은 의미가 있고 그 의미에 더하여 주님은 역사하셔서 여러분의 삶을 고치고 병을 고치고, 연약한 것을 강건하게 하고, 죽어가는 생명도 다시 살리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 성찬식에서부터 우리의 성찬의 자세를 다시 한 번 더 새겨서 성찬을 통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는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후 2016.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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