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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6 주일설교요약 "얼마나 주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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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6-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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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얼마나 주님과 상관이 있습니까?
성경> 요한복음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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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세족식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베드로에 대한 에피소드가 가장 많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한 뒤에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되면 참을 수 없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이 잘 되는 것은 곧 자신의 영광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 데도 가겠다고 말했고, 다른 사람들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버리지 않는다는 말도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히실 때는 대제사장의 종의 칼을 빼어 예수님을 보호하려고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잘한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제자들은 이런 적극성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베드로의 또 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차례대로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은 종들 중에서도 유대인 종들에게는 시키지 않는 가장 천한 종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일을 하시니 제자들이 얼마나 무안하고 불편했겠습니까?
그런데 차례가 베드로에게 이르자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던 이 세족식이 잠시 중단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차마 예수님에게 이 일을 시킬 수 없었나 봅니다. 6절에,“주님이 제 발을 씻기신다고요?”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내가 하는 이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7) 그 다음 8절에 베드로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내 발을 절대로 못 씻깁니다.”
다른 제자들은 그냥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절대로 이것은 안 됩니다.”
베드로가 이런 사람입니다. 참 인간미가 있습니다. 가끔 너무 앞뒤를 재지 않아서 일을 그르치기도 하지만 이런 인간미는 인성을 가진 주님에게도 흐뭇했을 것입니다.
 

상관(相關)이 없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베드로의 말과 행동을 흐뭇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길 수가 없다고 하는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하고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8)
이 말은 베드로의 생각을 확 바꿔버렸습니다. 이게 의리나 예의나 상하관계의 질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겁니다. 멈칫하고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러고는 베드로는 앞서 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합니다. 9절에,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9)
이 말은 그만큼 주님과 상관있게 살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까? 주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슨 일이든 다 할 사람이 베드로인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싶었던 베드로, 그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더 깊어지기를 원했던 베드로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과 하나 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주님 닮기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닮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드로와 같은 이런 뜨거운 소원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적인 관계를 넘어...
하지만 이런 베드로의 감성은 아직까지는 극히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이라면 인간미가 있어야 하지만 그 인간미가 하나님의 뜻을 가릴 때도 많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을 말리면서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는다고 하는데 다른 제자들은 가만히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에 이것은 안 된다고 말린 사람은 베드로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인간미가 있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그 뒤에 이어 하신 말씀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우리가 자신을 부인하는 일에는 인간적인 생각을 내려놓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당자 이롭고 좋고... 이런 것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이게 과연 하나님의 뜻이냐를 먼저 생각해 보는 자세,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냥 고향 사람이면, 동문이면 50점 먹고 들어갑니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일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 해 주는 베드로의 이 인간적인 말에도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단호하게 끊어버리셨습니다.
 

주님과 상관있게 사는 법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님과 상관있게 살 수 있습니까?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 씻어 달라는 베드로의 가슴을 파고 들 말을 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10)
이 말에 의하면 베드로는 이미 목욕을 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굳이 손과 머리까지 씻을 필요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분명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미 구주로 믿고 죄사함을 얻고 거듭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관계로 말하면 예수님과 베드로는 깊어질 대로 깊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을 씻어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발 씻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발은 그 당시, 하루 일과를 마치면 가장 더러운 신체부위입니다. 하루를 지나고 집에 들어오면 가장 많은 먼지가 앉은 곳이 발입니다. 그리고 발은 오늘 내가 어디를 다녔는지 그 이력을 다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을 씻는 것은 하루의 죄씻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발씻음은 우리의 성결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하여 죄사함을 받는 목욕을 한 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먼지를 묻힙니다.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목욕을 한 자인지도 모를 정도로 더러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속에서 우리에게 묻는 더러움을 씻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목욕한 것도 의심이 될 사람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과의 관계도 희미해져 버립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성령께서 우리에게 지적해 주시는 죄에 대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의 관계가 막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되려면 말씀과 기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기도 속에 더 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말년에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사하심과 깨끗하게 하심의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결함을 유지하게 될 것이고 그속에서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지속될 것입니다.(주후20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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