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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13 주일요약설교 "진정한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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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5-12-17

본문

제목> 진정한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
성경> 누가복음 2: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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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본문에 죽을 때가 되었지만 만나야할 한 사람을 만나지 못해 죽지 못하는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26절에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그는 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까? 그 답이 25절에 있습니다. 그는 진짜 기다렸던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
이스라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받는 위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면서 진정한 위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기 예수는 메시야라는 말입니다. 29절부터 시작되는 그의 찬송을 보십시오.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29-32)
이제는 드디어 자유를 얻은 듯, 이 노인은 기쁨과 감격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의 노래 내용에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시므온은 유대인인데 그는 자신의 눈으로 만민의 구원을 보았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가 기다렸던 이스라엘의 위로가 이스라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만민에게...그리고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었던 누가는 이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기록한 것 같습니다.
이 위로는 시므온에게만 필요한 위로가 아니라 모든 인류가 기다리는 위로였습니다.
 

진정한 위로
저는 요사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신문을 봐도, TV를 켜도 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청년부, 청소년부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저 자신 역시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함께 사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에서 지친 자들이 모여서 서로서로를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다윗이 위급했을 때 피난해 있었던 아둘람 굴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처럼 환난을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우리 목장에, 우리 교회에 모여 있습니다.
교회가 그 위로를 채워줄 수 있을까? 물론 현실의 교회를 봐서는 별로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경험한 목장은 완벽할 수는 없지만 가족보다 더 진한 위로를 주고받는 교회였습니다. 형제간, 자매간... 그보다 훨씬 더 진한 그리스도의 피가 그들을 하나 되게 하고 위로와 격려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진정한 위로를 위한 두 가지
 

1.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어야 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위로를 받았습니다. 즉 그 위로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였다는 겁니다. 사람의 위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위로입니다.
사람에게서 받는 위로는 한계가 있을 때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일시적일 수도 있습니다. 각자가 또 다른 자신의 사정이 있으니까... 마음은 있지만 지속적으로 위로해 줄 수 있는 여건이 안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속될수록 사람의 단점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힘든 사람일수록 조그만 섭섭함에도 크게 실망합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위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인간적인 위로만 서로 주게 받게 됩니다. 인간적인 위로는 충고로 변하고 상처로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 위로를 전달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정말 복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누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나 역시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위로를 구체적으로 기다렸던 사람이 있습니다.
노아의 아버지 라멕이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은 이유를 성경에는 이렇게 밝힙니다.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5:28-29)
이 말은 수고를 해도 대가가 없는 인생의 고통과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땅을 저주하시기 때문이며 그래서 인생들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라는 것입니다.
저주는 진노를 동반하는데...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징계의 개념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라멕과 시므온은 시대는 다르지만 같은 신앙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시므온 역시 고통 받고 있는 시대를 보았고 하나님이 그 땅에 대한 진노를 거두시고 메시야라는 진정한 위로자를 보내주실 것을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노아의 삶에 대해 성경은 기록하기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6:9) 그는 죄악이 하늘까지 닿은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산 사람입니다.
저는 라멕와 그의 아들 노아를 통해 하나님이 위로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하나님도 위로가 필요한 것을 아십니까? 물론 극히 인간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기대를 만족시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되었던 노아는 하나님이 모든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실 때, 그의 가족만 구원을 얻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위로가 되었더니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노아의 위로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시므온 역시 그의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위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를 통한 위로로 그를 만족케 하신 것입니다.
 

맺으면서 - 진정한 위로를 주고, 받는 사람으로...
신약시대 이스라엘에는 주의 위로를 구하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반도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진정한 위로자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극히 소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온, 그리고 이어지는 안나 할머니, 그리고 2장 앞부분에 나온 목자들, 마태복음의 동방에서 온 박사들...
그냥 단순하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생각만으로 진정한 위로를 만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실 성탄의 달에, 간절하게 주님을 기다리고 그 주님을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모셔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소유하고 받은 위로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위로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주후 2015.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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