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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1 주일설교요약(목장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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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2-11-14

본문

제목> 성숙한 믿음으로 갈 때 이해해야 할 세 가지 영적 진리
성경> 행18:5-11       찬송> 208 장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라는 말.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해하기 쉬운 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으면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잘 살게 된다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복 받는다는 말에서 우리는 첫째로 물질적으로 잘 풀리는 것, 둘째는 몸이 건강한 것, 셋째는 자녀가 잘되는 것, 이런 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면 이것이 무너지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따라 한 단계 또 다른 믿음의 성숙이 필요할 때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영적인 진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는 영적인 성숙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재 바울은 고린도에 있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을 통해 설립된 교회가 참 많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불신자가 회심하고 돌아오는 일이 이었지만 복음의 현장에는 복음의 대적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역하면서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이 환상 가운데 나타나서 자신에게 분명하게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9-10절입니다.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고린도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바울의 내적 문제들을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숙한 믿음으로 자랄 때 이해해야 할 영적인 진리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소명을 따를 때 평안이 아니라 두려움도 온다는 것입니다.
  5-6절에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후에는 이방에게로 가리라”
  그런데 여러분, 이방인 전도(선교)라는 목표는 처음부터 바울의 소명이었습니다. 행22:21에 보면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직접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지만 바울은 여전히 유대인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유대인들 가운데도 복음을 받고 돌아오는 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복음에 가장 걸림돌이 된 자들도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들이 항상 그의 목숨을 위협했습니다.
  기신자들이 복음으로 변하면 큰 역사를 이루지만 기신자들이 구태를 벗지 못하면 복음에 가장 큰 방해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목장에서 우리가 항상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기신자들은 섬김 받을 대상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새가족(vip) 섬겨아 할 자라는 사실입니다. vip는 예수님을 알아가는 즐거움에 신앙생활을 하고, 기존신자들은 섬기는 즐거움에 신앙생활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 전도’라는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 사명에 결단했을 때 그에게 찾아온 것은 평안이 아니었고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고린도에서의 사역을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붙잡고 달려가면 평안이 있고, 일사천리로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없었던 환란과 두려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두려움만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며 가겠습니까? 이 때 우리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넘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 주님이 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 말은 바울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아시는 주님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바울을 위로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만 그보다 더 큰 주님의 위로가 있기에 우리는 항상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2. 응답은 말씀 후에 오는 어떤 역사가 아니라 말씀 그 자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어떤 사람이 나서든지 해서 나의 상황에 변화가 일어나게 역사하는 것을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응답은 말씀 그 자체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의 사역에서 크게 위축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를 크게 위축시킨 것은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천막 치는 자신의 직업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언제 그를 해할지 모르는 대적들의 위협입니다. 그리고 그는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온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질병을 위해 하나님께 세 번 간구한 곳은 바로 고린도였습니다.(고후12:9)
  이런저런 일로 위축되고 두려움에 싸인 바로 이 바울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이란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행18:9-10)라고 말씀하신 것이 다였습니다. 별로 다른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바울은 고린도에서 자신의 육체의 질병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그때에도 주님이 바울에게 하신 일 역시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12:9)는 말씀이 다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11절을 봅시다.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바울은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최초로 고린도에서 장기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때에 주께서 주신 말씀은 부수적인 것이고, 실제 무언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주께서 주신 말씀 자체가 응답임을 말해줍니다. 그 후에 동반되는 실제적인 역사는 부수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대상은 엄밀히 말해서 ‘내’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바울을 해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행18:10)
  곧 하나님께서 바울을 보호하시는 것은 바울이 특별한 믿음이나 헌신 때문이 아니라, 고린도에 세워질 교회의 일원이 될 영혼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시며,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한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자신과의 관계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영적인 유아입니다. 영적으로 어리면 목장에도 자기의 유익이 없으면 안 나옵니다. 하지만 성숙하면 그 자체가 영적인 공동체, 교회이기 때문에 나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의 머릿속에는 우선한 것이 항상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를 위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핏 값을 치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동행해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님의 동행은 교회를 위한 일에, 교회를 이루는 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마28:20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면서 마태복음은 끝납니다. 아마 마태는 주님의 함께 하시는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의 복음서를 끝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어떤 사람에게 한 약속입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자”에게입니다.
  교회와 함께 가십시오. 여러분의 목장과 함께 가십시오. 복음으로 영혼을 구원하여 교회를 이루는 일에 함께 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교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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