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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29주일설교요약(목장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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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2-05-02

본문

제목>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 순종 그리고 능력
성경> 1:3-5
찬송> 67,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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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회복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에게 내면의 상처는 주님을 3번 부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직접 갈릴리 바다로 찾아오셔서 헛수고를 만회하는 고기 잡는 기적과 3번의 사랑고백을 하게 하시는 과정을 통해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내면의 상처가 치유되었다고 해서 사명을 다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다른 말로하면 내면의 상처가 있다고 해서 사명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는 말도 됩니다.
그러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또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능력
3절 말씀에 예수님은 사도들과 함께 있습니다. ‘사도란 사명을 주어 보낸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사명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명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능력을 받아서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1:8)
언제 이 약속은 성취가 됩니까?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성취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성령세례’(5), ‘성령의 임함’(2:3), ‘성령충만’(2:4) 이런 용어들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합시다. 그냥 우리에게 성령님의 오심과 역사가 필요하다는 것으로만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의 부활도 체험하고, 내적인 치유도 경험한 베드로는 여전히 무력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니까 베드로는 사명을 감당하는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2:14이후로 그의 설교로 3천 명이 회심하여 돌아옵니다. 사람이 두려웠던 베드로는 이제 당당히 사람들 앞에 서서 담대하게 설교합니다. 3장에서 성전 미문의 못 걷는 장애인을 고쳐줍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담대합니다.(4:13) 공회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을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4:19-20)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절대 나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면 우리도 성령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임했습니다. 언제?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고전12:3에는 분명히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을까요? 아니면 혹시 예수 믿고 거듭날 때 역사하는 성령 말고 또 따른 성령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두 분이라는 말도 들은 적도 없고, 쌍둥이 성령님이 계시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의 생각의 한계를 초월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 순종 곧 능력
우리가 능력이 없는 것은 성령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께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성령님의 지시에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시하십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속에 어떤 느낌(‘직관같은 것)으로 해주십니다. 성령께 의지하는 삶을 살면 성령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역사하시며 순종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음성에 순종하면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 둘, 그 능력을 넓혀 갈수록 능력은 더욱 강력해집니다. 그것을 가리켜 성령 충만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충만이란 결국 성령님의 영역이 나에게서 가득 차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입니다. 삼위의 하나님 중의 한 분입니다. 그 분은 자신을 인정하고 그 분에게 순종할 때에 우리 가운데서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이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모든 열쇠를 그 분에게 줘서 마음껏 열고 다니며 역사하실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분이 행하십니다. 그러면 나는 능력 있는 사명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역사 - 모든 사람에게
혹 어떤 사람은 초대교회처럼 어떻게 단번에 능력자로서 변할 수는 없습니까? 베드로는 이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지만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능력자가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날의 성령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성령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도 성령은 분명히 계셨습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 성령의 역사는 특정한 사람에게 그것도 특정한 시기에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오순절 이후는 다릅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의 임하심의 성격을 바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요엘서2:28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남종과 여종 - 자녀들, 젊은이들, 늙은이든 모두에게 다 부어준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믿는 모든 자에게 성령을 다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 성령께 순종함으로 성령의 충만 속에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예수를 처음 믿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바로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그것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일 뿐입니다. 그도 계속 순종하지 않으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과거보다 미래 -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것을 잡으라!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 두 가지는 내면의 치유와 성령께 순종함으로 말미암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내면의 상처의 치유는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이에 일평생 묶여있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치료되었다고 하면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내면의 이런 상처가 있구나!”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치유는 시작이요 완성이라고 믿어도 됩니다. 진정한 치유는 그 상처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데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면의 상처는 과거의 일입니다.
바울은 빌3:13-1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냥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미래의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말입니다.
앞의 일이 보이는 사람은 뒤를 돌아다 볼 겨를이 없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에 매이기보다는 받은 사명을 위해 성령께 순종함으로 능력있는 사명자로서의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 (주후 201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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