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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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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게르솜의 날들

성경> 출애굽기 2:11-22

찬송> 104,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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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금년 마지막 달에 모세가 겪었던 한 시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금년에 여기까지 온 우리의 삶이나 아니면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일생이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겪었어야 했을 그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여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모세라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의 부모는 차마 아이를 죽일 수가 없어 갈대상자에 아이를 띄어 보냅니다. 이 아기는 나일강에 목욕을 하려 나온 바로의 공주의 눈에 띄고, 공주는 아기를 양자로 키웁니다. 아기의 유모는 다름 아닌 생모가 유모가 되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서 왕족으로 학문과 예법을 익히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의 유모인 어머니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모세가 40세가 되었던 어느 날, 그는 궁 밖을 나갔다가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짐승 다루듯 학대하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버리고 모래에 묻습니다. 다음날 다시 궁을 나갔더니 이제는 히브리 민족끼리, 동족끼리 서로 싸웁니다. 그 사람들에게 가서, 서로 돕고 살아도 모자랄 판 때에 왜 같은 민족끼리 그렇게 싸우느냐고 말합니다. 그때 그 사람의 입에서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2:14)

이때부터 이집트 왕족 모세의 인생은 끝나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버립니다.

 

1. 동족을 돌아 볼 마음이 생겼다.

11절에서 모세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에서 나가다라는 말은 어떤 특별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그동안 머물러 있던 곳을 빠져 나오다라는 뜻의 강조용법입니다.

그때의 상황을 신약성경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라고 설명했습니다.(7:23)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묘사하고 있다.(11:24-25)

종합해 볼 때, 모세는 유모였던 생모의 신앙교육으로 자신의 민족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있다가 40세였던 어느 날 민족을 위해 나서기로 결단합니다. 그 첫 번째 일이 자신의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건을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모세의 신앙적인 동기에서 시작한 사건으로 말했습니다. 그는 애굽의 삶을 죄악의 낙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고난을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어려운 결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히브리서 기자를 통해 모세가 보여준 최고의 믿음의 행위가 바로 그것이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는 구체적인 현장은 목장입니다.

 

2. 고독의 시간 - 게르솜의 날들

모세의 그 믿음의 행위는 첫 번째부터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 일 후에 모세는 바로 도망자가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모세가 더욱 가슴 아파했을 것은 민족을 위할 그 원대한 계획이 시작도 못하고 초장에 박살이 나 버린 사실일 것입니다. 또한 자기 동족조차 자신의 희생적 결단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결단한 일에 축복이 따르지 않고 고난이 따랐습니다. 이런 경우 믿음 잃기 쉽습니다.

저는 모세가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남의 양떼를 지켜주다가 그 집 딸과 눈이 맞았습니다. 결혼했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때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짓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그 당시에 상황으로 이름 짓습니다. 모세는 내가 타국(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짓습니다. 이때는 모세에게 정말 고독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미디안 광야의 시기는 게르솜의 날들입니다.

 

미디안 광야에는 아내도 있고 자식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에겐 게르솜의 날들입니다. 우리의 외로움은 생각지 않는 곳에서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이불을 덮고 누워도, 집에 자녀들이 있어도 외로움은 물밀 듯 몰려올 수 있습니다. 게르솜의 날들이란 누구에게나 있는 날들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바닥을 치는 일이 있습니다. 금년 한 해를 보내면서 이 12월에 누구보다도 광야로 내쫓긴 것 같은 게르솜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았음에도 광야로 내쫓긴 사람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 사람도 역시 게르솜의 날들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게르솜의 날들의 의미

믿음의 결단을 한 것 같은데 왜 모세는 외로울까요? 왜 게르솜의 날들을 보내고 있을까요?

아직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 스스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결단했지만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실력은 구비했는지 모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종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셨던 것은 세상의 실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 곧 게르솜의 날들은 버리는 기간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모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버린 것 같은데 또 무엇을 버린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의지한 그 모든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왕궁의 것을 버리지 않은 채 주의 일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는 나의 일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게르솜의 날들을 단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을 다 버렸다면 그 날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아직 게르솜의 날들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아직 다 못 버렸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왕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언제 돌아갑니까? 버려야 할 것을 다 버렸을 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다 버릴 때입니다.

 

여러분들이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 구한 것들을 다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손에 다른 것을 쥐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2011년이 게르솜의 날들이었다고 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완벽한 게르솜의 날들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201112, 게르솜의 날들은 종언을 고하고 더 이상 그 날이 남아있지 않도록 하십시오!

버릴 것은 다 버리고 진정한 사명자로 거듭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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