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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주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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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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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변화

성경> 창세기 32:24-33:10

찬송> 85, 436


 사람과 인사를 나눕시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국의 베스트 셀러 시인 이정하의 <고슴도치 사랑>이란 시가 있습니다. “서로 가슴을 주어라/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말라/소유하고자 하는 그 마음 때문에/고통이 생기나니/ 추운 겨울날/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 했네/추위에 떠는 상대를 보다 못해/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 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멀지도 않고 자신들의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도 않을/적당한 거리에 함께 서 있었네/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었어도/그들은 서로 행복 했네/행복할 수 있었네” 우리 인생은 다 고슴도치와 같습니다. 이런 실존의 아픔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이기에 “변화”라는 단어는 실제적인 이슈가 됩니다. 그리고 “변화”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소망을 전해 줍니다. 인생의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은 위대한 변화의 사람, 인간의 변화 가능성의 한 모델이 되었던 하나님의 사람, 야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스토리를 잠간 살펴봅시다.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이삭과 리브가는 잉태하게 됩니다. 기쁨도 잠시 어머니 리브가의 태중에서부터 야곱과 에서는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됩니다. 이기적인 죄악의 본성을 타고 나는 것이죠! “창 25: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어머니 리브가는 장자가 아버지를 승계한다는 전통을 따르지 않고 나중에는 독단적으로 장자에서의 축복권을 찬탈하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해서 편애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야곱은 형 에서가 피곤하여 지쳐있을 때 축복권을 사게 됩니다. “창 25: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에서는 참으로 회개해야만 할 일입니다. “창 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하게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신다는 확신과 가르침을 받는 것도 타당합니다. 이후에 야곱은 나이 많은 아버지의 눈을 속이고 축복을 빼앗게 되고 에서는 야곱을 죽이고자합니다. “창27: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하란의 삼촌 라반에게 피신을 시키게 됩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는 야곱이 변화되도록 만드는 세가지 키워드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고통입니다. “창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야곱은 서울에서 부산 왕복거리에 해당하는 삼촌 라반의 집으로 홀홀단신으로 걷는 고통의 광야 레이스를 하게 됩니다. 광야는 고통자체입니다. 고독한 곳입니다. 광야 40년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필요한 인생 레슨을 받게 됩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 만이 인생을 논 할 수 있다”라는 혹자의 말처럼 메마른 광야를 거쳐 본 자만이 변화의 필요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민수기는 ‘봐예다바르(רבדיו)’로 시작한다. 이 말은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셨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회당 전통에서 민수기는 이 첫 구절 대신 ‘광야에서’라는 뜻인 ‘베미드바르(רבדםב)’로 불렸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두 이름 모두 히브리어 ‘다바르(רבד,말씀)’를 공유하고 있고 민수기 전반적 내용이 ‘광야에서’라는 이름에 상응하고 있어서 정착된 이름인 듯하다. 시편 119편 105절에 나오는 “말씀”도 ‘다바르(רבד,말씀)’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말씀이라는 다바르에서 광야라는 단어가 나와 같은 어원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광야 같은 고통 중에 오직 말씀이 그를 위로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생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말씀 아니겠습니까?


  둘째는 자신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신적 능력을 체험한 사건입니다. 야곱은 하란 향하여 가는 광양의 노정에 해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잠을 자는데 꿈을 꿉니다. 천사가 하늘까지 닿은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의 내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너를 지키시겠다고 하십니다. 잠이 깬 야곱은 두려움에 사로 잡히며, 이곳에도 하나님이 계신다하며 돌기둥을 세우고 “벧엘”이라 이름하며 십일조를 드릴 것을 서원합니다. 우리가운데 하나님을 확신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계신가요? 믿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아직 확신이 없다면 만나주시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기만 했던 마마보이 야곱이 사랑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변화됩니다.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게 되면 변화가 됩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철없던 아이들이 사랑을 배우게[ 되면 부지런해지며 성숙해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왜 변화되어야 할까요?


첫째는 변화되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학 화장실에 이런 낙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은 죽었다-니체” 이렇게 써놨습니다. 이것을 본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밑에 썼습니다. “니체는 죽었다. - 신” 그걸 본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밑에다 썼습니다. “니네 둘 다 죽었다 - 화장실 아줌마” 무신론 철학자 니체는 본래 독실한 기독교 배경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독일의 목사였습니다. 니체는 청년 때에 세속적인 철학에 심취하면서 무신론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부모는 니체의 변화를 위해서, 믿음으로 다시 설 것을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무신론을 주장하면서 미쳐서 죽습니다. 낙서처럼 휘갈긴 그의 메모지에는 “나는 지옥으로 간다”하고  죽었습니다. 변화되지 못한 한 인간의 종말은 이처럼 비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 주님의 뒤를 좇으면서도 주님의 말씀대로 변화되지 못한 유다의 비극적인 인생 드라마를 소개하고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주님과 함께 생활했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주님을 떠나고 배가 터져 죽고 말았습니다. 비극적 운명을 마지한 사람입니다. 변화되지 못한 사람의 비참한 종말을 그리고 있습니다. 


둘째는 인생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변화시키기 위해 연출하시는 셋트장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정관념과 신념에서 벗어나 참 신앙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야곱은 신념의 사람이였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권을 사람의 속임수와 교활함으로 빼앗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신념의 사람은 종교를 이용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이용합니다. 가롯유다는 신념의 사람이였습니다. 정치 이데올로기의 노예와 같았습니다. 그에게 진리인 성경은 한갓 종이 조각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은 30세겔에 팝니다.

   사실 야곱은 벧엘에서 이미 약속의 말씀을 받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31장 3절의 이 말씀은 야곱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창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야곱의 입장에서 보시면  그가 이제는 삼촌 라반 보다 몇배의 갑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과 사랑하는 아내 라헬도 얻었습니다. 그런 그가 신념으로 인생을 산다면 그는 칼로 죽이기를 다짐하고 있는 형에서가 있는 고향으로 결코 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약속의 말씀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제 에서를 만나야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는 얍복나루에서 홀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을 만납니다. “창32: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창 32: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창 32: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은 실제로 엄청난 문제의 해결을 눈앞에서 보게 됩니다. 사람이 변화되면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이 됩니다. 야곱은 선물을 준비하고 다리를 절면서 땅에 일곱 번 땅에 머리 숙이고 절을 하며 형을 맞이합니다. 시퍼런 칼날의 사람, 복수의 사람 에서는 온데 간데 없고 해피엔딩으로 마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오직 말씀과 기도로 변화됩니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오늘의 사건 속에서 야곱에게 두 요소, 말씀과 기도는 무엇이였을까요? 말씀은 약속으로 주신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너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그는 이 말씀을 붙들고 얍복나루의 하나님과의 필사의 만남! 생사의 갈림길의 절대절명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 기도가 경야기도회로 장산나루의 기도가 되시기를 빕니다. 명제적인 질문드리면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포항에는 포스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는 대학이 있는 한동대학입니다. 채플관 앞에 가면 why not change the world! 왜 세상이 변화되지 않을까요? 기도합시다.


☞ 성도님은 변화를 사모하십니까? 나는 어떤 모습이 변화 되어야 할까요? 돌아가면서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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