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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4주 복음을 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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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0-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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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 복음을 전합시다

성경> 마 28:16-20

찬송> 369, 505

 

  ·전·행 3·1 운동을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부족한 부분도 있겠지만 다만 말씀에 순종하고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전도의 명령을 지상명령 혹은 대 사명이라고 일컬었고 그것은 신약 성경의 4복음서의 결론과 사도행전의 서론의 대 명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동일한 말씀으로 오늘도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이웃과 민족들을 바라보시며 마태복음에 보면<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마가복음에 보면<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너희를 전도의 목적으로 세상으로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성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첫째, 부족한 자(17절)입니다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17절)”는 오늘 본문을 보시면 참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당부하시는 유언적인 지상명령을 하달 받는 자리에서도 아직 주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중 몇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의심하는 무리들이 섞여 있지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처럼 전도는 모든 것이 완벽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도 복음전파나 전도를 만장일치로 가결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주님은 섞여있는 그 무리들에게 동시에 말씀을 하시듯이 우리도 완벽하지 않지만 전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한 개인을 두고 보더라도 부족한 부분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무리중에 의심하는 자가 있었던 것처럼 나의 삶 속에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정말 못합니다. 전도가 힘듭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구약의 모세(출 3:11, 4:10, 4:13)와 신약의 바리새인과 세리(눅 18:9-14)가 하나님의 좋은 예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모세는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라고 고백하지만 결국 순종하므로 이스라엘의 민족의 출애굽을 이룬 위대한 영도자로 세우십니다. 너무도 크게 쓰임을 받아서 그 시체도 찾을 수 없는, 혹시 후손들이 우상으로 섬길까봐 사실 하나님이 감추실 정도라고 신학자들은 해석하기도할 정도입니다. 다른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는 바리새인에 비하여 하나님께 인정받은 세리(눅 18:9-14)는 기도하기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그러나 주님이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4). 어떤 성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둘째는 사랑 받은 자(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19절)” 하나님의 십자가의 용서와 사랑을 받은 자는 십자가만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 본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말씀하시며 삼위일체의 사역이 복음 전파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합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먼저는 죄의 씻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죄의 씻음은 피가 있어야하고 그 피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 만이 우리 죄를 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양의 재물과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재물의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구약의 제사법을 떠나서 물리적인 차이를 떠나서 아주 본질적으로 말입니다. 양은 짐승이고 강제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제물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십자가 제물, 죽으심에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8, 9). 놀라운 이 사랑의 관계가 완벽하게 유지되는 삼위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의 결과를 낳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순종하시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글에 보니까? 말로만 십자가의 사랑을 말 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유월절 양을 잡을 때 피를 흘리는 것처럼, 죄의 형벌로서의 죽음과 흘리는 피를 직접 보아야 한다는 했습니다. 피가 튀기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죄의 형벌이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가를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우리는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고전 11장 24절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내 몸이라고 하시고 이것을 받아먹고 기념하라고 하십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하십니다. 언젠가 읽었던 가시고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가시고기는 알을 낳기 위해 둥지를 만들고 알이 부활될 때까지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알을 보호합니다. 이윽고 알이 부화되면 지친 아비 가시고기는 둥지 옆애서 죽어 새끼 가시고기들의 먹이가 됩니다. 그렇게 자란 새끼 가시고기는 어느새 아비 가시고기가 되고 새끼들을 위하여 장엄하게 죽어 갑니다. 자신의 아비가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5:14-15, 18)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화목케하는 직분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고후 5장 18절에서는 누구와 먼저 화목하는 것입니까? 자기와 즉 하나님과입니다. 화목케 하는 직분은 그래서 특별히 모든 성도가 해야하는데 그것은 회개하지 않은 인생과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전도를 말합니다.

  찬송가 508장은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구찬270장, 신508)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찬송가의 작시자 엘라이져 캐슬(Elijah Cassel)은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는 특별히 전도에 특별한 사명을 느끼며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전도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는 복음 전도라고 고백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돈 버는 것보다도 전도 하시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렇구 말구요.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 옆에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란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찬송이 바로 이 구 찬송가 508장 인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셋째는 보냄을 받은 자(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19절)”.  우리는 두 가지 면에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우리에게 교회가 아닌 불신자들과 함께 일하고 공부하는 각자의 일터가(선교지)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6:13절에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은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사도는 헬라어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오래전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 선언문을 “내가 온 것은--” 혹은 “인자가 온 것은--”이라는 표현에 담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의 아들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설명하시고자 할 때마다 이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자, 눅19:10을 읽어 보실까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라” 자, 그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 우리를 향하신 향한 마지막 당부, 마지막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눅 12:8-9)”.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난 2010년초, 우리는 장전행31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작정하신 분들은 사명으로 감당하시고 작정하지 못하신 분들은 반드시 한분도 빠짐없이 작정하도록 해서 주님의 엄위하신 명령에 순종하시는 우리가 되십니다.

  

 성도님은 작정하셨습니까? 아니면 “저는 부족해서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시며 변명 중에 계시지는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장·전·행 3·1 운동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하기를 원하실까요? 함께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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