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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주 내 영혼이 상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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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0-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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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영혼이 상할 때
성경> 시143:3-6
찬송> 83, 386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평안한 환경 가운데서 불안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란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이 문제라기보다는 그 환경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더 큰 문제라는 말입니다.

잠4:23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우리 그리스도인에게서도 이런 위기는 찾아올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다 약해서 그렇지…”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떻게 살겠냐?”고 말합니다. 강심장만이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형편과 상황, 또 그 시기에 따라서 사람은 얼마든지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강심장’하면 다윗과 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그는 이스라엘 모든 군인들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적의 장수 골리앗과 맞장을 뜬 사람입니다. 적장 골리앗이 보기에도 다윗은 소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골리앗 앞에서 큰 소리를 쳤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는 본문에서 다윗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4절에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다윗도 무너집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속이 상하고 참담한 지경까지 이른 걸까요? 다윗이 지은 이 시편 143편은 많은 학자들이 압살롬의 반역 때 지은 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3절에 ‘원수’는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역의 소식을 듣고 그가 왕궁을 급히 빠져 나와 도망하고 있을 때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기를 “사울 족속의 모든 피가 이제 너에게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그의 신하 아비새가 당장 가서 쳐 죽이겠다고 말했을 때, 다윗은 “그냥 두어라, 내 몸에서 난 자식도 아비를 죽이려 하는 판인데 남인들 나를 비난하지 않겠느냐”(삼하16:11)라고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속이 상하고 참담한 이야기입니까? 4절은 그때를 기억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은 다 연약하고, 그 연약함 속에 정신없이 헤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속히 정리가 되고 그 위험한, 참담한 상황을 빠져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그 상황을 빠져 나옵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다윗은 고백이 중요합니다.


1.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5)

5절.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우리가 심령이 상할 때, 속이 상할 때, 스스로 참담해질 때 우리 자신에 얽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몰두하게 되면 그것이야 말로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극히 세속적인 태도로 변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오히려 편안하여 별 일이 없을 때는 신앙적인 것 같습니다. 교회도 나오고 예배도 드리고 때에 따라 차례가 되면 봉사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일이 터지면 교회도 안 나오고, 예배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고민이 많고 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일을 지키지 못할 인간적인 명분도 확실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심령이 상할 때 하나님을 바로 향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큰 복이요,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훈련된 사람의 몫입니다. 아무나 그렇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딤전4:8에 육체의 연단보다 훨씬 더 유익이 있는 경건은 더욱 연습하고 훈련해야함을 말합니다.


2.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루셨던 일들을 기억하고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5)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깊이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①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셨던 일들 놀라운 응답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히 이전에 자신이 이와 유사한 사건 속에 하나님이 그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기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 심령이 많이 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시142:3) 그때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셨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 속에 파묻히지 않고 하나님의 이전 나에게 행하셨던 은혜의 역사로 들어가면 우리는 속이 상하는 참담한 자리에서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②주님의 응답의 기억뿐만 아니라 실패하여 침륜에 빠지고 불순종으로 책망 받았던 일들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을 받아 피신한 것이 그의 죄에 상관이 없는 억울한 일이었다면, 압살롬의 반역으로 쫓겨나야 했던 것은 분명 범죄의 결과로 얻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건망증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회개의 기억들이 있지 않습니까? 회복의 은총 속에 우리는 금방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언제 그랬냐?’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시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긍휼을 우습게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그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신32:7에서 모세는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교훈들이 있습니다. 그 속에 이미 하나님의 메시지는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시 49:20)에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달라야 할 것 중에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습니다.


3. 이럴 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성령님께서 다시금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 고백하게 하십니다.(6)

6절.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우리는 무엇이든지 사모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모하는 자리에 무엇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사랑하면 저것을 미워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일로 속이 상할 때 그대로 두면 세상의 걱정, 근심이 우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 속에서 계속 역사합니다. 그것이 발전하면서 시기, 질투, 미움으로 변합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할 수 없으면 심한 좌절과 낙심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심령이 속에서 상하고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참담하게 되는 것’입니다.(4)

그러나 주님을 사모하게 되면 얼마나 쓸 데 없는 것으로 내 마음이 상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소용없는 것으로 혈기를 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죄 된 것으로 시기와 미움을 쌓았는지 알게 됩니다.  사모하는 심령은 주님이 채우기기 때문입니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시107:9)


심령이 상하는 일이 있으십니까? 주님을 사모하는 심령은 모든 것을 해결한 심령입니다.

(시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나는 문제가 생길 때 문제에 파묻히는 형(形)입니까 하나님께로 향하는 형(形)입니까? 문제 앞에 보일 영적 태도를 위해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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