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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주 거룩한 욕심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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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0-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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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거룩한 욕심을 가져라
성경> 왕하2:1-14
찬송> 337, 354

최근 법정스님의 죽음(불교용어로는 입적)을 통해 그 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무소유의 삶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 분의 무소유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사에 대부분의 불행한 일은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기독교는 많이 소유하라고 가르칩니까? 물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소유한 자가 가질 수밖에 없는 약점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물질을 믿기 때문입니다. 분명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차라리 그때 내가 물질 없었더라면…”하고 크게 후회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물질은 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4:4)는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물질관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지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유한 물질은 누구의 손에 들여지느냐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사용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정복하는 종교입니다. 물질에 관한 한 기독교는 할 수만 있다면 많이 소유하여 더 선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만족하며 사는 것도 신앙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물질의 은총을 받아 그 물질로 더욱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은 더욱 신앙적인 삶임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욕심을 가질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입니다. 성경에 질투도 여호와를 위한 질투가 있습니다.(민25:11) 그렇다면 이런 욕심은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욕심입니다.


1. 오늘 성경 본문에서 이런 거룩한 욕심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유명한 엘리야 선지자의 제자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수제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 곳곳에 선지학교가 많아 선지 생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때에 가장 조급해진 사람이 바로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로부터 큰 축복을 받고 스승의 대를 잇는 능력 있는 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언제 스승이 하늘로 부름을 받지 몰랐던 엘리사는 엘리야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2절, 4절, 6절에 보면,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3번씩이나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스승을 혼자 가게 할 수 없다는 엘리사의 의지는 아주 단호하고 결연합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당신의 영혼이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2,4,6하)

이 말에는 스승을 따라가고자 하는 제자의 결연한 의지가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드디어 스승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를 묻습니다.(9)

이때 엘리사는 자신의 속내를 간절하게 말합니다.

“엘리사가 이르되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9b)

성도 여러분, 엘리사는 자기의 스승 엘리사보다 갑절의 성령의 역사를 있기를 구했습니다. 시대는 점점 더 악하여져 가는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섬겨야할 자신은 너무나 연약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그저 평범한 한 무명의 선지자로 살아가기는 싫었습니다. 그의 스승 엘리사처럼 한 시대에 하나님의 능력의 종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고 싶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거룩한 욕심’입니다.

“더 많은 능력을 주십시오. 더 많은 물질을 주십시오. 더 많은 은사를 주십시오. 이 모든 것은 다 이 시대에 주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겠사오니 더 많이 주십시오.” 하나님은 출애굽 이스라엘에게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하였습니다.(시81:10)

우리에게 이와 같은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욕심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계속 거룩한 욕심을 가지고 이번 특별새벽기도에 임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성경에는 거룩한 욕심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1)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를 생각해 봅시다. 그에 대한 소개는 이렇습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눅19:2-3)

당시 세리는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치부되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신체적인 핸디캡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내적치유가 필요한 그 사회에서 왕따를 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자신의 마을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시는 길에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길을 메웠습니다. 제대로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마 사람들을 비집고 앞자리로 가려고 했지만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자리를 내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버리는 이 사회를 탓하며 더욱 분한 감정을 지닌 채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삭개오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너희들이 자리를 안 내줘? 그렇다고 내가 이 기회를 놓칠 줄 아냐? 그래 나는 뽕나무에 올라간다. 나를 비웃고 욕해도 좋다! 난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볼테야!”

바로 이것이 거룩한 욕심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데는 이런 거룩한 욕심이 있어야합니다.


2)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다고 외치면서 환도뼈가 부러졌어도 놓지 않는 바로 그 열심, 바로 그것이 거룩한 욕심입니다.(창32:24-26)


3)한 맹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에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칠 때, 무리의 꾸짖음을 듣고도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이것 바로 거룩한 욕심입니다.(마20:31)


삭개오, 야곱, 맹인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오직 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긍휼을 믿는 믿음이 있으니 심판이 임박한 소돔성을 위해 그렇게도 끈질기게 중보 기도한 것입니다. “의인 5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45명이면…, 40명이면, 30명, 20명, 10명이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지금 네가 장난 치냐?”라고 말 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소돔의 멸망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의 이 거룩한 욕심을 허락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룩한 욕심을 가집시다. 세속적인 욕심은 버리고 주님이 기뻐하실 거룩한 욕심, 주님도 감동하실 거룩한 욕심으로 삽시다. 거룩한 욕심으로 새벽을 깨웁시다. 거룩한 욕심으로 봉사합시다. 거룩한 욕심으로 사업합시다. 거룩한 욕심으로 공부합시다. 거룩한 욕심으로 자식을 키웁시다. 거룩한 욕심으로 교회를 사랑합시다. 거룩한 욕심으로 비전을 가집시다.


☞현재까지의 특새를 통한 은혜를 나누어봅시다. 거룩한 욕심이 있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봅시다. 더욱 기도로 더욱 도와야 할 지체는 있지 않습니까? 함께 간절하고 뜨겁게 기도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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