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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주 말씀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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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10-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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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말씀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
성경> 눅10:38-42
찬송> 412, 433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나사로의 집을 들렀습니다. 예수님이 이 집을 방문하자 집에서 가장 바빠진 사람은 마르다였습니다. 마르다는 곧 바로 예수님을 대접하기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제자들을 대동하였기에 이 나사로의 집에는 적어도 13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것입니다. 마르다는 언니였고 동생이 마리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마리아는 분명 체질적으로 손님을 대접해야한다는 생각으로 부엌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많은 손님을 대접하기에는 자기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얄밉게도 동생 마리아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여놓았는지 꿈쩍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 아래에 앉아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하다하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하고 말입니다.

이 마르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렇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1. 이 사건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가 하는 일은 무가치하게 여기시고 마리아가 한 행위를 칭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그 어디에도 예수님이 마르다의 섬김과 봉사를 무가치하게 여기신 말씀이나 흔적을 볼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예법에 식사예법은 중요한 예법입니다. 유대인의 최대의 절기인 유월절 예식에 핵심은 식사법입니다. 예수님 역시 마지막 예식을 유월절 예식으로, 먹는 예식 성만찬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먹을 것이 없이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을 걱정하시면서 그들의 가장 기본 생존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계시록 3:21에는 예수님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식탁의 교제를 곧 영생의 교제로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을 위해서는 항상 누군가는 섬김의 손길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교회에서 나누는 중식이나 석식도 누군가의 섬김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런 모든 섬김은 더 효과적인 봉사와 예배를 위한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많은 사람들의 이런 섬김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섬김을 어떻게 무가치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그러면 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봉사를 하면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그녀에게 있는 것은 염려와 근심이었습니다.(41)

여러분 봉사에 있어 핵심은 기쁨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봉사하지 못하면 봉사하고 손해 보게 됩니다. 즉 수고는 수고대로 하고 그 공은 까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염려와 근심하게 만들었습니까? ‘많은 일’입니다.(40,41) 자신이 감당하기 너무 많은 일을 생각해 염려했고 그 일을 하면서 시간 내에 다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근심이 그를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요리를 하는 일에 제법 능숙했을 법한 이 마르다는 예수님을 귀하게 잘 대접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 많은 일을 다 하려니까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간단한 차 한 잔에 과일 몇 조각을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염려와 근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일을 주님은 기뻐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할 수 있다면 많은 일을 하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3. 그러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진정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때’ ‘시기’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몰랐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대접을 받으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충분히 대접을 받고 음식을 나누며 교제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큰 수고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마르다에게 지금 그렇게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려고 한다면 몇 가지만 하라는 것입니다. 아니면 한 가지만이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41-42) 차 한 잔만으로도 족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주님이 원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예수님의 발치에 앉는 것이었습니다.(39) 발치에 앉았다는 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놓치지 않고 집중해서 정확하고 바르게 듣는 것입니다.

시기를 아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섬기며 봉사하고, 즐거워하고 축복하며 교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금식해야 하고 때로는 기도에 전념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를 알았던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자리를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는 말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그 말씀을 받아 마음에 새겼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막바지에 예수님은 또 다시 한 번 더 나사로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때 역시 마르다는 일은 하느라 바쁘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값비싼 최고의 향유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습니다. 이 행위를 가룟유다는 뒤돌아서서 비난 합니다. 이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니라.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8,7)

예수님은 역시 때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위대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사모하며 그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맺으면서 -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최근 가장 분주한 일은 무엇입니까? 지난 한 주의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이었습니까? 최근 나의 기분을 가장 크게 좌우하게 되는 사안은 무엇입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또 하나 질문합시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주 앉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앉아 있는 자리가 여러분의 관심의 자리입니다.

주님과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자리입니까? 주님은 인자하신 얼굴로 여러분을 바라보시고 여러분은 사모하는 얼굴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입니까?


☞마지막 질문에 몇 사람이 답을 해 봅시다. 시기상, 그 자리는 주님이 원하신 자리인지 답해봅시다. 때를 분별하고 분명한 우리의 자리를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함께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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