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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셋째주 / 광야학교3 (눅4: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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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9-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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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광야 학교(3)

- 성경> 눅4:1-13

- 찬송> 380, 342

 오늘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 중에서 두 번째, 세 번째 시험에 대해서 말씀을 받겠습니다. 먼저, 시험의 장소 문제를 다루겠습니다. 두 번째 시험의 경우는 마태복음에는 ‘높은 산’이라고 기록이 되어있고 세 번째 시험은 ‘성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세 번째 시험도 광야의 시험 속에 다 포함시키는 것이 옳으냐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장소의 이동이 있었는가? 누가복음 본문에서 두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이끌고 천하만국을 보여주면서 하는 시험인데, 유대 광야 그 어디에서도 천하만국을 다 볼 수 있는 산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그 당시의 광야의 지형이었습니다. 또 세 번째 시험에서 ‘광야에서 성전까지 40일간 먹지 못하고 주리신 예수님이 어떻게 이동이 가능했을까?’라는 의문도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세 번째 시험은 장소적인 이동이 아니라 환상 가운데서 이루어진 시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환상 가운데로 이끌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던 것처럼 이 시험도 그렇게 생각됩니다. 특히, 이 시험이 성령에 이끌려 시작되었다는 것에서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첫 번째 시험뿐만 아니라 둘째 셋째 시험까지 모두 다 광야학교의 수업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겠고, 여전히 예수님은 광야수업 중에 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1. 두 번째 시험 - 마귀와 하나님, 둘 중에 누구에게 절할 것인가?

마귀는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서 천하만국을 보여줍니다. 여기의 천하만국은 당시에 로마가 지배하고 있던 모든 나라를 말합니다. 마귀는 이 천하만국의 모든 권위와 영광은 자기에게 넘어왔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약성경에서 4번이나 마귀를 가리켜 ‘세상 임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7:25; 요12:31; 요14:30, 요16:11) 그렇다면 그 당시의 로마의 왕제는 ‘디베료’이었지만 실질적인 왕은 마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실제로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세상의 그 어떤 세력들의 마음을 움직여서라도 세상의 권위와 영광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지금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준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7절입니다.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7)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십자가 없이도 완성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마귀에게 절만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8절.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8)

 우리의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 우리가 자주 직면하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누구에게 절하며 섬기느냐는 문제입니다. 마귀는 자신을 위장한 채, 우리가 처한 위급한 상황에서 고난 없이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말입니까? 자신에게 절을 하면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누구에게 절하는 것이며 누구를 경배하는 것이며 누구를 섬기는 일이 될 것인지를 말입니다. 마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2. 세 번째 시험

마귀는 또 예수님을 이끌고 성전 꼭대기에 세웁니다. 그리고는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뛰어내려도 될 이유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대는 내용에 우리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기록되었으되”(10)

이제까지 ‘기록되었으되-기록된 바’라는 말은 예수님의 전용어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귀가 이 말을 사용합니다. 마귀는 이제까지 두 번 ‘기록되었으되’라는 예수님의 말에 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기록되었으되’라는 무기를 가지고 등장했습니다.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면 하나님이 그냥 보고 계시겠느냐면서 ‘기록되었으되’의 성경 시편91:11-12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이 사자, 천사들을 보내서 너를 지키겠다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더 구체적으로 그 천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있지 않느냐?”

이것이 분명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명하시는 말씀이면 예수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단의 이 세 번째 시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노린 것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그 답은 예수님이 어떤 말씀으로 이 시험도 이기셨는지를 보면 확실해집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12)

이 마귀의 세 번째 시험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테스트 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험입니다. 사단의 의도는 이 시험을 통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신뢰를 깨려는 것입니다.

 이런 시험이 사단의 최종 카드로 시도되는 것은 이 시험에 빠질 위험도가 생각 외로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험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집니다. 대단한 착각입니다. 요8:44에 보니 사단 마귀의 다른 이름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는 속이는 것에 전문가입니다.

사단이 시킨 대로 하고 난 뒤에 우리가 겪는 것은 무엇일까요? 혼란입니다. 하나님은 이럴 때 나를 도와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왜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그것은 의심으로 변합니다. 그리곤 믿음을 버리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과 우리,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못 믿어하면서 이것저것으로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확실히 알겠으니 그렇게 해 달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자신들은 말씀을 붙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속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단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냐’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에게는 타락하고 범죄하여 지옥 갈 우리가 예수 믿고 천국 가게 된 것만큼 큰 하나님의 이적(표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마지막 ‘시험’이라는 더어가 주는 의미를 새기고 마치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시험은 원어로 ‘페이라스모스(Peirasmos)’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상황에 따라 우리말로 ‘시험’(Test)이 되기도 하고 ‘유혹’(Temtation)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원어의 같은 한 단어가 이렇게 다르게 기록이 될까? 그것은 누가 이 시험의 주체냐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험을 하실 때는 테스트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의 믿음의 향상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단 마귀가 이 시험의 주체일 때는 유혹일 뿐입니다. 유혹은 사람을 넘어지게 하여 패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똑 같은 단어, 시험이라는 ‘페이라스모스’라는 단어가 우리의 신앙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우리를 패망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 우리에게 다가오는 시험에서도 승리하여 믿음의 진보를 이루는 성도들이 됩시다.

  내가 겪은 시험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그 결과 그것이 테스트였는지 유혹이었는지를 나눠봅시다. 그리고 앞으로의 승리를 위해 함께 기도해 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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