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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월 둘째주 / 예수님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들(요1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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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9-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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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눈물 흘리게 하는 것들

-성경> 요11:1-35

-찬송> 338, 356

성도 여러분, 가장 최근에 눈물을 흘린 일은 무엇입니까? 눈물은 언어보다 더 진솔한 마음의 표현인지 모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이 세 번 나옵니다. 그 중의 한 번은 오늘 본문 마지막 35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11:35절은 성경에 나오는 구절 중에 가장 짧은 구절입니다. ‘예수님이 우셨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 인간의 가장 진실한 표현인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사실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에 나온 그대로 예수님의 우는 모습을 구체화시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우실 때의 심정이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표현의 원어적인 의미는 마음이 찢어지고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감정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그렇게 비통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까? 예수님을 눈물 흘리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는 35절의 예수님의 눈물이 단순히 그 앞에 있는 구절인 33-34절의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눈물은 이 사건의 처음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눈물 흘리게 한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익숙한 마음이 주님을 눈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빨리 베다니로 오셨으면 했습니다.(11:3) 그러나 의외로 예수님은 이틀을 더 유하시다가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십니다.(7) 그런데 그때 제자들이 만류합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8)

그들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서도 가지 않을 때 큰 안도감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이 다시 가자고 하는 말에 놀라며 반발합니다. 이미 오라버니가 죽은 후에 도착하신 예수님을 두고 마르다는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 평소에는 온순한 마리아조차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32)

“어서 와 주세요, 예수님.” “가지 마십시오, 예수님” “좀 더 빨리 오시지요, 예수님”

이 말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결같이 다 자신의 잇속만 차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급할 때 찾으면 도와주는 해결사와 같은 존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들의 신변의 안전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4절.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40절도 참조)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조급한 요청에도 아무 상관없이 행동하셨습니다. 제자들의 신변의 안위에도 신경을 쓰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오직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질병을 통해서도, 고통 가운데서도, 박해와 죽음 가운데서도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는 생각을 잘 하려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은 우리의 형편과 상황에 자신의 일정을 맞춰주셔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나를 섬겨주지 않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지 못하는 신이라면 필요가 없는 신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분이고, 채워주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세상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주님이 필요할 뿐이라면 그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그것 외에 우리에게 더 큰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롬8:32에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개역성경)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만(은사만) 필요하지 그 아들은 필요 없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까? 마치 아버지는 필요 없고 아버지 안주머니에 있는 돈만 필요로 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2. 사명보다 세상의 위협에 짓눌려 사는 것이 주님을 눈물 흘리게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로 가자고 했을 때 제자들은 왜 예수님을 만류합니까? 그것은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9-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은 이미 요9:4-5에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님이 계시면 그 때와 그 장소는 낮이라는 말씀이며,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때와 그 장소는 밤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밤과 같은 곳에 가셔서 빛을 비추어 낮으로 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7)

엡5:8에는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어둠의 자식들이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곳을 이제 우리를 향해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려고 보니 세상의 위협이 보통이 아닌 겁니다. 가기 싫습니다. 그래서 주저하다가 그냥 포기해버립니다. 예수님은 이럴 때 우리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우리가 사명으로 살지 못하면 결국 생존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목숨 유지용이 될 때 주님은 슬퍼하십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도 재미있는 일, 잘 되는 일, 그리고 알아주는 일만 찾는 우리로서는 이미 주님이 우리를 보면 슬퍼하실 일은 충분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어두움 속에 빛을 들고 가겠느냐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3.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사는 것이 주님을 눈물 흘리게 합니다.

이 사건은 나사로의 병에서부터 시작하여 죽음이 이야기 흐름의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이 생로병사(生老病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병에 대해 무력하고,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서는 더욱 숨조차 크게 쉴 수 없는 사람의 체념이요 하소연입니다.

즉, 인간이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망이라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 앞에 마리아와 마르다는 울고 있고, 사람들도 따라서 함께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도 울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이 우십니까? 예수님의 심령은 비통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조문객들의 표정과 그들이 하는 말과 그들의 울음소리에 피가 들끓고 내장은 뒤틀리는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 있는 인간의 무력함이 예수님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사망 권세 앞에 망연자실한 인생의 모습에 예수님은 비통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이 초상집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장면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집에 문상을 하러 갔다고 한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찍 부모를 잃고 세 남매가 함께 자랐습니다. 오라버니는 두 자매에게 아버지와 같았을 것입니다. 이 오빠가 죽었는데 어찌 울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비통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은 죽음을 권세를 물리치실 주님 앞에서 그들이 더욱 절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발산과 같은 생명의 장수를 곁에 두고 사망권세 골목대장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생이 정복하지 못할 마지막 사망의 문제 앞에서도 믿음으로 당당히 서길 원하십니다.

눈물에는 슬픔과 애통의 눈물이 있는가 하면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의 눈에서 비통의 눈물을 그치게 하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합시다. 우리 때문에!!!

나는 주님의 눈에서 어떤 눈물을 흘리게 할 자입니까? 비통의 눈물의 요소들이 나에게는 없는지 돌아보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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