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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첫째주 / 이것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습니다.(막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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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8-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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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이것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습니다.
* 성경> 막8:35
* 찬송> 289, 295

지난 주간 우리나라의 최고의 이슈는 톱 연애인 최진실 씨의 자살 사건입니다. 이미 ‘베르테르 효과’라고 해서 최진실 모방 자살 건으로 보이는 사고가 연이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살이라는 현상은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특별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이고, 8년 만에 두 배가 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의 위패에 ‘성도 최진실’이라고 쓰인 것을 보면서 그리스도인과 자살이라는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연애인 자살은 대부분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이은주, 유니, 정다빈. 안재환 등. 물론 믿음이 견고한 사람일 경우에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사람의 상황이 급변하는 경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신앙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게 되고 그때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대적 사단 마귀는 사회적 분위기를 이용해서 자살이라는 도구로 우리의 영혼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기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긴장해야 합니다.

1. 자살한 사람을 정죄하지 맙시다. 그렇다고 그것을 용인하지도 맙시다.

자살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자신도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되지 않았던 행동을 결국에는 자행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지금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나도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떤 고민을 하게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7:2에는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살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살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통념 때문입니다. 그 말은 곧 자살을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주장은 아직도 여전히 신학자나 목사님들을 통하여 주장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주장에는 성경에 기록된 자살한 사람들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사울, 아히도벨, 신약의 가룟 유다입니다. 이들의 공통적인 점은 마지막 그들의 모습이 영락없는 저주받은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살을 했다는 것만 가지고 오늘날의 모든 사람의 자살을 동일하게 대입할 수는 없습니다.

자살은 자신에 대한 살인죄입니다. 살인죄는 심각한 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모든 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의 죄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의 한 계명입니다. 살인죄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가 되고 다른 모든 계명은 어겨도 구원에는 관계없는 계명입니까? 그런 구분은 성경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죄든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사함을 받는 자들입니다.

정리하면, 자살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잘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살에 대해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며, 그렇다고 그것을 용인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가 “그 상황에서 불가피했겠구나!”하고 이해의 여지가 있는 범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하듯이 자기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죽이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교회 공동체가 사랑으로 서로를 보살핍시다.

근래의 자살의 가장 큰 이유는 우울증입니다. 우리나라 전체 국민의 13%가 우울증을 앓고 있고 우울증을 앓는 사람의 15%가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은 자살한 연예인들의 사례에서 보았습니다. 우울증은 우리가 앓게 되는 많은 병 중의 하나입니다. 이 병의 뚜렷한 증세는 ‘외로움’입니다. 자연히 외부와 접촉이 줄고 자기만의 시간에 몰입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되고 어느 한 순간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병에는 그 병에 따른 여러 증상이 있습니다. 폐 질환은 기침을 합니다. 간 질환은 피곤함, 가려움을 느끼기 쉽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울증에 나타나는 증세 중의 하나는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울증을 이상한 정신병으로 생각합니다. 10명을 만나면 1.3명이 이 병을 앓고 있습니다. 감기에 걸리는 것보다 더 흔한 병입니다. 우리가 감기에 걸리면 약도 먹고 주사도 맞고 해서 치료를 하면 됩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맞는 치료를 받고 약을 먹으면 됩니다.

옛말에 병은 자랑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상처는 드러낼 때 치유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직면’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교회 공동체는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도 되는 건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드러낼 때 치유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제일 큰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살전1:3에는 믿음은 역사를 일으키고, 소망은 인내를 하게하고, 사랑은 섬기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연약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공동체는 치유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공동체가 치유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구역이 모일 때, 지회가 모일 때,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든 장소와 모임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강조한 것은 ‘서로를 돌아보라’는 말이었습니다. 신약에는 처음 교회가 생기자마자 바로 서로를 돌아보는 일을 하였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4)

3. 삶의 의미와 목적을 날마다 새롭게 합시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살은 커녕 죽을 만한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사람이 됩니다. 빅터 플랭크라는 심리학자는 ‘의미요법’이라는 유명한 심리치료요법을 체계화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있을 때 살아남는 사람과 죽는 사람의 차이를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건강상태와는 별 상관이 없었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의 거대한 의미 같은 것이 혹 없을지라도 그날 하루하루 사는 것에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결국 살아남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는 마6:33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 자로서 창조되었고 그 목적을 위해 살아갈 때에 가장 행복한 자로 프로그래밍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걸 만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더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35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바울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삶의 목적과 방향이 확실해졌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3-14)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전9:25-26)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 삶은 정말 소중합니다. 왜요? 하나님이 나에게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시간을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에서 이런 말을 보고 참 의미 있는 글귀라고 생각되어 수첩에 적었습니다. “오늘 이 날은 어제 죽었던 사람이 그렇게 살기를 원했던 내일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존귀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매일 소중하게 하루하루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자살 충동에 대하여 1) 충동 경험이 있으면 나눠봅시다. 2) 우리 구역 공동체의 역할에 대해서 말해 봅시다. 3) 나 스스로의 예방책에 대해 나눠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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