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산교회채널
 가정교회360
 예배생방송

사역의 지경이 넓혀지는 교회

목장자료실

12월 둘째주 /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7-12-14

첨부파일

본문

제목>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성경> 시139:7-12
찬송> 394, 399

● 외로운 인생
  문학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헤밍웨이는 자살하면서 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텅 빈 전구처럼 고독하다.”
  사람들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외로워하지만 도리어 유명해지면서 더욱 고독함을 느낍니다. 사람에게는 안전의 욕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욕구를 소속감으로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지연, 학연, 혈연에 그렇게 얽매입니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의 이런 모든 노력도 결국 나는 고독하다는 것을 외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상의 외로움의 해소법은 결혼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거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는 배우자를 주셨습니다. 전9:9에,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그러나 결혼이 인간의 외로움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않습니다. 결혼 후 오히려 더 깊은 고독의 수렁으로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들이 있어도 외롭습니다. 자식이 있어도 그렇습니다. 욥은 절친한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위로자로 찾아 왔지만 나중에는 정죄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는 어떻습니까? 남편의 순전함을 이해해 주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고통 중에서도 그렇게 붙들려고 하는 하나님을 도리어 욕하고 죽으라고 대들었습니다.
  그러면 꼭 친구들이 문제가 있고, 아내나 남편이 문제가 있는 배우자이기에 그럴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혼자일 때가 있습니다. 나의 고민, 나의 문제는 그 누구가 대신할 수 없는 오직 나만의 것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부부라고 할지라도 내가 가진 문제에 대해 나처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떤 때는 위로 한다는 말이 참견이 되고 더 짜증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가깝다고 하지만 도울 수 없는 문제, 나만의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먼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부가 가족이 정말 사랑하고 충분히 짐을 같이 질 수 있다면 외로움은 극복이 되는 것입니까? 그럴 수 있기를 바라고, 또 그것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축복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것도 궁극적인 고독의 해결책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혼자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혼자임을 느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같이 해 주고 싶어도 같이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수술대 위에 같이 누울 수 없고, 또 죽을 때 같이 갈 수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혼자라는 것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영적인 도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남편이 있어도 남편이 도울 수 없고, 아내가 있어도 아내가 도울 수 없는, 오직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외로움의 궁극적인 해결자이신 하나님
그러나 아무도 같이 할 수 없는 바로 그 시간, 바로 그 장소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요? 그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시공간의 한계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전지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1-5) 이어 그는 무소부재하신, 편재하신 하나님, 어디에나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8a)- 하늘에 하나님이 계신 것은 당연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스올(곧 음부, 땅밑)에 가서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도 계신다고 고백합니다.(8b) 무엇하시려고 거기까지 계시는 것입니까? 우리를 감시하여 죄를 범하였을 때 가차 없이 벌주시려고요?
9-10절을 보십시오. 그 분은 지구 끝에서도 우리를 당신의 강한 손으로 붙으신다고 합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에 칠흑 같은 어두움이 드리울지라도 주 앞에서 흑암과 빛이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상황이나 형편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실제 사선(死線)을 오가는 바로 그 현장에도 주님은 함께 하십니다. 수술대 위에도 주님은 함께 누우십니다.
마11:28-30에서 주님은 우리와 함께 멍에도 메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나의 남편이, 나의 아내가, 나의 부모가, 나의 자식이 함께 할 수 없는, 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어 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주님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의 생각도 아십니다.(2) 다른 사람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를 하지만 주님은 내 혀의 말이 무슨 뜻으로 했는지도 정확하게 아십니다.(4) 바로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해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나의 마음만 더 답답해지고 위로 해 준다는 말은 간섭이 되고 더욱 혼란하게 만드는데 우리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너의 마음을 다 안다. 네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했는지 내가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윗이 감격하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6절에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신앙에는 이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어디에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여러분은 이 하나님과 함께 다니기 위해 하나님의 어떤 형상을 만들어 지닐 필요가 없습니다. 부적과 같은 그 어떤 보호증서를 지니고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해서 택하신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신앙 - 무소부재의 하나님.
저는 이번 선교지 방문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위대성과 탁월성을 다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어떻게 그런 복음의 불모지에 가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달고 감사했습니다. 그것은 한국에 계신 하나님이 선교지 현장에도 역시 계시고 역사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형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이 형상 안에 있는 분이라고 하면 그 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 항상 지니고 다녀야 했을 것입니다. 보통 세상에는 그 신이 위대할 수록 큰 신상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그 큰 신상을 가지고 어떻게 다닐 수 있겠습니까? 선교사님들에게는 자녀교육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인간적으로는 눈물을 흘리지만 신앙적으로는 용감하게 떼어 놓습니다. 왜요? 부모들이 돌보지 못해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이 신앙으로 기독교는 세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우리는 어디에나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시면 외롭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더 외롭지 않습니다. 인생의 즐거울 때가 괴로울 때나 언제 어디서나 내 곁에 계시고 나의 마음속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살아갑시다.

☞ 나의 외로움의 경험을 나누어보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능력을 고백하고 기도합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장산교회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