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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네째주 / 내 집은 기도하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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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7-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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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집은 기도하는 집
성경> 눅19:41-46
찬송> 188(구,180), 368(구,486)

1. 오늘 성경 본문에는 예수님에 관하여 다른 곳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다는 기록입니다. 이것은 사복음서 중에서 누가만의 기록입니다.
눈물은 어떤 상황이 평범한 한계를 넘을 때 나타나는 육체적인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 눈물에는 평소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은 조금 전에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찬양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 성으로 오셨던 분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찬양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말씀하시면서 찬양을 정당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목표한 성에 와서는 성을 보시면서 우신 것입니다. 왜 우셨을까요? 42-44절. 이것이 눈물의 의미입니다.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예루살렘 성의 참혹한 멸망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에 역설이 들어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그 평화의 성을 보시면서 “네가 평화를 모르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확실하게 해 둬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연히 평화를 누리며 살 백성이라는 것과 그 평화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통탄할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잃고 사는 것은 예수님에게 가장 큰 슬픔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들 통하여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당할 때 자신의 마음의 아픔을 이렇게 노출시키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
주님의 주신 땅에서 평화롭게 삽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화롭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2. 그러면 이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들은 무엇 때문에 평화의 성에서조차 멸망을 받아야 했습니까?
그 이유를 이어지는 예수님의 성전에서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분노하셨습니다. 성전이 본래의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갔을 때 성전 안에는 장사하는 사람과 돈을 환전해 주는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시장인지 성전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일년에 세 번 성전에 와서 순례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일단 성전에 들어가려면 유대인 성인들은 1년에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어야 했습니다. 또 더욱 큰 문제는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양, 비둘기 등과 같은 제물을 가지고 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바로 환전도 해 주고 제물도 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에서 제사보다 니라 장사가 더욱 중요한 일이 되어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은 종교지도자들의 묵인 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장사치들은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영업을 유지시켰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성전의 역할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치들과 환전하는 자들의 상을 엎어버리고 내쫓으시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46a)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성전을 보시면서 가장 안타깝게 여기신 사실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전에 기도가 막혔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는 곧 성도들의 기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과정에는 향을 올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향은 오늘날 성도들의 기도라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세례요한의 아버지 스가랴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에 백성들은 밖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나옵니다.(눅1:10), 계시록에는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언급했습니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계 5:8)
그런데 지금 성전은 그 기도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올려져야할 기도가 제대로 올라가지 않으면 그 성은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에 관한 일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다가올 임박한 진노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기도해야 할 이유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적인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기도할 때에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개인이 기도하는 것도 들으시지만 교회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함께 하십니다. 응답하십니다. 교회가 기도한다는 것은 곧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 되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특별새벽기도회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제공하신 기도의 향연의 자리입니다.

4. 성전은 기도의 향이 타올라야 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성전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찬송가 266장(구200)2절-“죄악 세상 이김으로 거룩한 길가는 나의 마음 성전 삼고 주께서 계시네”라고 찬송합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기도의 향기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이 올리는 기도의 향기를 맡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누가 기도의 향기로 하나님을 흠향(歆饗)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까?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에게 허락하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 만물에서 그 어떤 피조물이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인간을 제외한 어떤 피조물도 수면 시간 외에 의지적으로 눈을 감고 몇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없습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불신자들도 그럴 일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보의 80% 이상을 시각을 통해 얻기 때문에, 눈을 감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동물에게 있어서는 목숨이 위태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감아야 삽니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보입니다. 눈을 감으면 생명이 풍성해집니다.

5. 예수님은 구약성경 이사야56:7의 말씀을 인용하여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56장을 찾아서 읽어보면서 너무 소망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사야56:7 말씀은 곧 우리를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즉 기도하면, 기도로 너를 채우면 내가 회복시킨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56:3-7)
하나님은 기도의 집에서 문제(불임의 문제)를 고치시되 이전보다 더욱 복되게 회복시키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눅19: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의 집과 강도의 소굴은 서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이는 기도의 집이 기도로 채워지지 않으면 강도의 집(소굴)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집과 강도의 집(소굴)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모두 다 강도의 소굴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강도의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 교회를 기도로 채워진 성전으로, 나 자신을 기도 향기 가득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듭시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의 향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 특새가 반을 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특새를 통하여 1)은혜 받은 것 2)힘든 것 3)여전히 요청되는 중보기도 제목을 나누고 서로 기도의 고리가 되어줄 수 있도록 간절하게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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