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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둘째주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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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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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
성경> 삼하 23:8-17
찬송> 459(구,514), 461(구, 519)

사무엘하 21-24장은 사무엘서를 마무리 하면서 저자가 몇 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었던 것을 추가 기록한 부록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여기에는 다윗의 통치기간에 있었던 ①두 가지 하나님의 진노를 다윗이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말하고 있고, ②강력한 다윗 왕국에 대한 하나님께 찬양, ③그리고 다윗의 왕국을 견고하게 만들었던 다윗의 용사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에 다윗의 용사를 기록한 내용 중의 일부분입니다. 23장 8절부터는 다윗의 용사를 세 부류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세 명의 용사, 둘째 세 명의 용사, 셋째 30인의 용사입니다.
다윗의 나라는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리스도의 견고한 나라를 위하여 충성된 용사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핵심적인 용사 6명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전투에 뛰어난 용사들이었습니다.

● 첫 번째 세 사람
첫 번째 사람은 8절에 나오는데  ‘요셉밧세벳’이라고도 불리는 ‘아디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단번에’ 800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9-10절에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모였을 때, 이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싸울 생각은 않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혼자서 블레셋 대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쳤다’는 것입니다. 현대어성경에는 ‘팔에 쥐가 나고 칼잡은 손이 굳어져 풀리지 않을 정도까지 적군들을 쳐 죽였다.’로 번역하였습니다. 도망갔던 백성들은 전세가 역전이 되는 것을 보고 다시 돌아와서 엘르아살 뒤를 좇아가며 노략만 했습니다. 세 번째는 11-12절에 나오는 하랄 사람 ‘삼마’입니다. 그는 농작물을 약탈하려는 블레셋 대적을 혼자서 막아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을 정리하면 1)이 세 사람은 전투에 있어서는 탁월한 자들이었습니다. 2)용감한 자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운 자들이었습니다. 3)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실의에 빠진 백성들에게 사기를 올려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주님의 교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어떤 일로 위기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시험에 들 수도 있습니다. 그때 헌신 된 어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 두 번째 세 사람(13-17)
13-17절은 또 다른 세 용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체적인 이름은 18절부터 소개되고 있는데 아비새, 브나야, 또 한 사람은 익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세 사람과 다윗 사이에 있었던 일화를 먼저 소개하면서 이들의 용사됨을 소개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추수한 것을 약탈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다윗에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는 그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는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보면서 그 고향 땅에 얽힌 추억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다 문득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이 생각났습니다. 마침 목이 말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어릴 때 마시던 고향의 시원한 우물물을 생각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내게 마시게 할까?’하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세 사람이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곧 이어 이들은 바로 그 우물물의 물을 길어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자신들의 목숨을 우물물 하나에 건 것입니다.

과연 이런 충성이 옳은 충성입니까? 이건 충성이라기보다는 맹신이라고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들에게는 다윗 왕이 전부였습니다. 그들에게 다윗이 없는 자신은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자신을 조국을 통치하심을 믿었습니다.
다윗의 나라는 앞으로 다가올 그리스도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가 원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그의 나라를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들의 충성은 그들의 지도자를 위한 충성으로 나타납니다. 다윗이 훌륭하기는 한 사람이었지만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바울도 자신을 위해서라면 목이라도 떼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로마서 16장에 소개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롬16:4) 바울은 열정적인 복음전파자였지만 그것이 완벽한 인격을 갖추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주 지도자격의 사역자들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지도자들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위한 순종과 충성은 이렇게 이루어져갈 때에 교회도 견고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이들이 길어온 물을 받아들고는 도리어 슬퍼하고 탄식합니다. 그것은 충성스런 신하들의 생명을 드린 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이것은 물이 아니라 그들의 피다”
그는 자신의 경솔했던 말을 시인합니다.(17a) 그러나 그런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왕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는 충성스런 신하들에 탄복하였습니다. 그는 그 물을 결국 여호와의 제단에 부어드렸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충성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용사들 사이엔 여호와께서 세우신 왕과 여호와께서 붙여주신 용사들이라는 상호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이와 같은 성도들과 목회자가 있으면 어찌 부흥하지 않겠습니까?

● 기록되지 않은 사람
그런데 다윗의 용사를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는 다윗의 오른팔 심복이 있습니다. 그는 무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왕의 비서실장까지 겸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요압’입니다. 그런데 왜 요압이라는 이름은 용사의 명단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까? 사실 요압이라는 이름은 누구보다 가장 먼저 나와야 할 이름입니다. 그는 다윗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들 요나단이 다른 왕자들을 죽이고 다른 나라로 망명을 했을 때도 아들을 향한 아비의 마음을 알아 데리고 온 사람이 요압이었고(삼하13-14장)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죽였을 때에도 이 일을 가장 선두에 처리해 준 사람이 요압이었습니다.(삼하11장) 그러나 요압은 충성을 하되 자기의 왕의 마음보다 자기의 마음대로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각에 왕에게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왕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사람을 죽였습니다.(삼하20장) 다윗 통치 말기에는 다윗은 이 요압의 자기 마음대로의 행위 때문에 곤란을 겪었습니다. 그는 충신이었지만 자기의 뜻대로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마지막 정리된 명단에 없습니다.
두 번째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의 이름도 밝혀지지 않습니다. 아마 그도 역시 용사였으나 나중에 다윗의 왕국에 끝까지 충성한 모습으로 마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으로 보여 집니다.
이들은 모두 성령으로 시작한 것 같지만 결국 육체로 마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충성합시다!

성경에는 명단이 지루할 정도로 나열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너무나 소중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이런 용사들을 찾으십니다.

☞ 1) 나는 용사입니까? 2)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3) 나는 끝까지 용사의 명단에 기록될 수 있는 자입니까? 기도합시다.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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