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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둘째주 구역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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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산지기 작성일2006-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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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공과(06-11-05)-

제목> 요셉 지파의 불평
성경> 수17:14-18
찬송> 183, 395

우리에게는 요셉 지파라는 용어가 그렇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에서 요셉은 두 분깃을 받아 아들들의 이름으로 새 지파명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창48:22) 그래서 땅을 분배받은 사건을 기록할 때도 16장 5절부터는 에브라임 지파의 경계를, 17장부터는 므낫세 지파의 경계를 분명하게 나누어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지파를 통합한 이름은 요셉 지파이며 각각을 나눌 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분배 받은 이 요셉 지파에게 불만이 생겼습니다.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14) 그들은 실제로 제비를 뽑을 때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한 번의 기회만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실제 이름만 두 지파이지 분배 받은 땅은 한 분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요셉 지파,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이 주장의 부당함을 분배 당시의 상황보다 그들 지파의 시조인 요셉의 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요셉지파는 공로의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요셉 지파들의 불만은 그들 지파의 시조인 요셉이 이스라엘 전체에게 끼친 공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사실 그들은 다른 지파에 비해 적은 땅을 분배받은 것도 아니고 분배받은 땅이 형편없는 땅도 아닙니다. 단지 왜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조상 요셉이 자기 민족에게 끼친 공로를 아직까지 특권의식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요셉에게 분명 야곱이 두 분깃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이제 와서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누구 때문에 우리 민족이 살게 되었는데? 우리 민족은 이미 400년 전에 이 땅에서 굶어 죽었어야 할 백성이 아니었는가?”
어쩌면 이미 그들은 분배 받은 순서에서부터 유다 다음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 지파는 언제부턴가 유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주에 받은 말씀에서 그는 낯 뜨겁게 며느리와의 관계 속에 아이를 낳은 사람입니다. 그것에 비해 요셉은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입니다. 형들에게 팔려서 다른 나라로 갔는데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죄수가 되었는데도 또 잠잠하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더니 결국 당대에 최고의 부국 애굽에서 총리가 된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굶어죽게 되었을 때 자신의 총리권세로 자기 집안을 구원한 사람입니다. 요셉의 자손들이 정말 충분히 어깨에 힘줄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고백이 되지 않고 자신의 공로가 되면 불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자신이 좀 더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모습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은혜가 없습니다. 공로의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데, 이래 뵈도…” 이러면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요셉 지파처럼 자신을 잘 알아주지 않으면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섬기는 모든 일들은 은혜로 감당하는 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은혜가 빠져나가면 어느 샌가 공로가 되어버립니다. 공로가 강하면 은혜는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대신에 은혜가 가득하면 공로의식은 희미해지고 사라지게 됩니다. 교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불평, 불만을 쏟아내 놓든지 그것으로 자신의 뜻이 통하지 않으면 교회를 떠납니다.

2. 요셉 지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마지막에 자신이 그렇게 사랑했던 아내에서 났고 자신의 가문을 아사(餓死) 직전에 구원한 요셉에게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잇게 하지 않고 왜 유다를 택했을까? 장자인 르우벤이 아니라면 유다보단 요셉이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그가 마지막 자식들에게 축복을 할 때는 그의 생애의 말년이었을 때였습니다. 사람은 생의 말년에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47:9)
‘험악한 세월’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출생부터 그는 형으로 태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동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장자권만 얻으면 축복받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고생길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했던 신부는 절세미인 라헬이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보기도 싫은 언니 레아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인 라헬에게서 많은 자식을 낳고 싶었지만 원했던 라헬은 아기가 없고 왜 그렇게 못생긴 레아는 아들도 그렇게 쑥쑥 잘 낳는지요. 외삼촌 밑에서 결혼으로 속고, 또 임금으로 속고, 고생은 바가지로 하고. 이제 겨우 한 밑천 잡아서 고향에서 행복하게 살려고 했더니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낳은 늦둥이 요셉을 잃어버리고. 그런데 말년에 식솔들을 먹이지도 못한 채 굶어 죽을 뻔했고. 나중엔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나중에 애굽에 총리가 되어 나타나고…
그가 결국 깨달은 것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원했지만 하나님은 라헬이 아니라 레아를 첫 부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지할 남자가 없었던 레아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가문의 정통성은 레아의 소생이 이어 가도록 하셨습니다. 인생의 노년에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직 그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요셉 지파 역시 그들의 조상 야곱이 깨닫고 고백했던 이 신앙을 그들도 고백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에 순종할 수 없고 결국은 가득한 불평, 불만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복 마저 놓치고 더욱 황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3. 요셉 지파에게 도전의식(개척정신)이 없었습니다.
도전할 것이 없으면 불만이 생깁니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정복해야 할 땅이 있고 그들의 대적이 강할 때는 그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겐 대부분의 가나안은 정복이 되었다는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싸움이 끝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여전히 미정복지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수13:1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그 남은 땅은 이러하니…"
하나님은 이제 각 땅을 분배를 하고 난 뒤에 각 지파가 소속된 지역의 미 정복지는 각 지파가 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지파가 그들에게 분배된 지역에 있는 미정복지를 그냥 그대로 놔  두고 있었습니다. 요셉 지파 역시 그렇습니다.(수16:10, 17:12)
여호수아가 불평하는 요셉지파에게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15)
이 말에 요셉 자손은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16절)
전혀 싸울 의지가 없습니다. 싸워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삶의 의미는 없어지고 그때부터 불평과 불만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의 고백으로 우리 자신을 영적으로 재무장합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2-14)

→나의 현재의 신앙생활이 요셉 지파의 같은 상태에 놓여져 있지 않습니까? 1,2,3중에서 그 원인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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