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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합시다.(2005.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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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허재영 작성일2005-03-23

본문

제목>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합시다.
성경> 벧전4:12-16
찬송> 137, 365, 513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이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의 시작을 알리는 주일입니다. 이렇게 종려주일로 시작된 고난주간에 예수님은 고난의 일정을 보내시다가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십니다. 그렇기에 이번 주간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적인 사건 즉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가게 된 근거가 이 주간에 일어난 사건을 통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 주간의 절정의 사건이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삼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정확하게 깨닫는 것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구역공과(05-03-25, 인도자용)-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표현을 빌려서 그 정답을 말하면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함께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고 말했습니다.(롬6:8;골2:12)
그렇다면 주님과 함께 죽는 것,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후 200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또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할 수 있습니까? 과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진정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당하는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려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게 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울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사울은 예수님을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였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예수님을 핍박한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받을 때 예수님의 고난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믿는 자는 처음부터 고난을 각오하고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것에는 고난도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빌1:29) 그러므로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는 말은 제대로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교회 역사에서 환란과 핍박은 항상 있었고 그것은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구분하는 기회가 되었고 신자들은 그것을 통하여 더욱 강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었습니다. 초기 로마의 관리로써 기독신자였던 베드로(사도 베드로가 아님)는 미보클레더우스 황제 때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엄청난 고난 끝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는 어떤 협박과 고난에도 끝내 굽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신앙을 지키고 순교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쓰여진 후 기독교인들의 순교자 없었던 시대가 없었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 순교당한 성도들의 수효는 최소한 오천만 명이 된다고 말합니다.

2.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받는 핍박으로 고난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딤후1:8에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미 그의 선교여행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숱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고후11:24-27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았습니까? 감사하고 기뻐하십시오.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막1:38) 결국 이 전도를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하며 고난을 받게 될 때에는 “내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구나”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4절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제 4월부터 본격적으로 1.3운동을 전개하려고 합니다. 하루에 최소 세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밥을 세 번 먹듯 세 명에게 전도를 하자는 것입니다.

→ 1.3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권하기. “노는 입에 전도하자(찔러보자)” - 우리 속담에는 “노는 입에 염불한다”라고 되어 있다.

3. 주의 교회를 위해 봉사할 때 받는 고난으로 고난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골1:24에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이 땅은 고난의 땅이고 우리의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입니다.(시90:10) 고난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 있는 고난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벧전2:20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15-16절을 읽어봅시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교회를 위해서 받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계속되는 성도들의 고난과 희생으로써 더욱 견고해집니다.
주의 교회를 위한 수고를 귀하고 복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특별히 남겨 놓으신 고난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해 수고하게 될 때 감사하십시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에 교회를 위한 염려가 있으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후11:28)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에 참예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을 바라보십시오. 이것을 바라보면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고난 후 영광’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참예는 이제 그리스도의 영광에의 참예로 결론나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주간 주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시고 더 나아가 우리의 남은 여생에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삶을 살아 주님의 영광에도 참예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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