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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母)교회 동문 모임 -이정우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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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3-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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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일 월요일 저녁 6시에 모교회 청년대학부 동문들이 모(母)교회에서 소위 말하는 번개팅으로 모였습니다. 우리는 청년대학부 명칭을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근 30여년 만에 나사렛 1기부터 7기까지의 동문들이 번개팅으로 모였음에도 30여명이 모인 것에 놀랐습니다. 이제 모두 나이 쉰을 다 넘겼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후배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멀리 진주, 대구에서도 왔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갖지 못하고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만나 잠시 안부를 나누고는 이어지는 이야기가 ‘교회당 뜰이 이렇게 작았었느냐?’는 말과 지금은 개조되어버린 마룻바닥 기도실 이야기였습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할 때의 우리의 이야기는 그 속에 다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식사 후 나눔 시간에, 각자의 교회와 나사렛에 얽힌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7기의 후배들은 1기의 선배들이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이젠 50대로 함께 늙어간다는 말에 웃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한 7기 자매는 1기 선배와 결혼해서 부부로 살고 있다는 말을 해서 더 웃었습니다.(참고로 저는 4기입니다.) 우리는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2-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그 자리에 동문모임에는 전혀 상관이 없는 한 사람이 초청되었습니다. 중등부 시절 우리를 지도했던 전도사님이셨습니다. 키 작고 조그만 체구의 얼굴에 살이 없어 광대뼈가 보이셨던 전도사님. 대학생으로 오셔서 기거할 곳이 마땅치 않아 예배당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잠을 주무셨던 분. 시골교회에서 독습으로 풍금을 익혀 이상한 손가락으로 웬만한 곡은 연주하셨던 분... 후에 내가 신학생이 되었을 때에 이 분이 공부도 잘하셨다는 것과 학적 깊이도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끔 나의 설교에도 등장하셨던 분입니다. 지금은 대구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는 사이즈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난 군 제대를 하고 친구 한 명과 배낭여행 중에 그 분의 사택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도 있었는데 목사님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동문들이 이전의 추억을 나눌 때 이 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분에게 직접적인 지도를 받은 적이 없는 1-3기 선배들도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난 이 분이 직접 작곡했던 곡을 중등부에서 입례송으로 불렀고 이 곡을 그때의 후배들이 지금도 기억하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아마 이 날 불렸던 30년 전의 이 아련한 찬양에 목사님도 놀라셨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분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없는 이유를 그 분의 말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자신의 교역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바로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 분은 교회의 사이즈와 관계없이 위대한 목회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날 그 자리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빌4:1)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의 제자들이 한국 교회 곳곳에서 목사로, 선교사로, 장로로, 권사로, 집사로 섬기고 있으니 그 분은 누구보다 위대한 목회자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난 이 말을 의지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고등부 시절에 전도사님이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도 바쁜데 추억을 떠올리며 살만큼 여유롭지 못하다.”는 말을 들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서신서에서 많은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감사와 안부를 그리고 축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추억의 순기능에 눈을 떴습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는 것이, 좋은 선후배와 엮어지는 것이, 좋은 목회자를 만나는 것이, 그리고 그들과 함께 복음으로 교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날이었습    니다. (2013.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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