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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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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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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혀의 권세
성경> 약3:2-6
찬송> 505, 347장

성도 여러분, 어제는 8월 한가위, 추석 명절이었습니다.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영과 육이 더욱 풍성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명절에 가족 친지를 만나면 서로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눕니다. 그러면서 정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나 사실 격의없이 이런 저런 말을 하다보면 상처를 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혹시 이번 명절에 오랜만에 만난 형제간에, 동서간에, 고부간에 대화를 나누다가 마음 상하거나 마음에 맺힌 응어리와 같은 것을 남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에 가족들 만나기가 겁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포되어지는 말씀으로 힘과 용기 격려를 얻기도 하지만 소화해 내지 못하는 말씀 때문에 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도들끼리도 말 때문에 서로 위로받고 격려하기도 하지만, 말 때문에 상처받아 깊은 시름 속에서 헤매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말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중요한 말 사용에 대해 성경적으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할 것인지를 듣겠습니다.

●사람의 입(혀)
입은 모든 동물들에게 다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과 사람의 입은 그 용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말(언어)의 사용입니다. 짐승의 입은 먹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먹기 위해서만 입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기능이 있습니다. ‘말,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입을 통하여 의사를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사람들이 말을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 입은 짐승의 입과 다른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짐승보다 더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도 사람이 실수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말의 실수가 가장 심각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

더 나아가서 야고보 선생은 말하는 것과 우리의 신앙의 정도, 수준을 연관지어 말씀합니다.
약1: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즉 ‘그 사람은 참 경건한 사람이야’라고 말할 때에 그에게 많은 경건의 특징이 있겠지만, 지금 야고보는 그 사람의 말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지난 안민 장로의 간증에 재미있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마실의 은사’를 받은 것까지는 좋은데 ‘속 뒤집어 놓는 은사’까지 받은 사람들이 있다고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많이 교제하고 신앙의 체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덕을 세우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가 말 사용에 있어 유의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들을 보십시다.

1. 혀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약3:3-5) - 덕스러운 말,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합시다.
말에는 창조성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을 하면 복된 현상들이 나타나고 저주의 말을 하면 저주의 현상들을 맞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잠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는 우리가 했던 말의 열매를 먹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3:3에는 우리의 혀를 말(馬)의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다스리듯 우리의 혀를 통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야생마도 입에 재갈을 물리게 되면 순한 말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혀를 통제할 수 있을 때 그 혀는 제 구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절에는 큰 배가 작은 키 하나로 전체를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의 입술은 우리 몸의 아주 적은 한 부분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인생 방향을 결정하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는 적은 불씨지만 그냥 두면 큰 불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혀의 놀림이 얼마나 큰 결과를 낼 수 있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의 잘못된 말을 처음부터 바로 잡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해질 수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가위와 톱과 혀가 서로의 힘 자랑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가위가 말을 했습니다. "나의 이 예리한 날을 보라! 내가 가기만 하면 세상에 아무리 질긴 천이라도 다 잘려지지"하며 으시댔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톱이 말하기를 "뭘! 그 정도가지고 그래? 내가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도 맥없이 쓰러져 버리는 것"하고 자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혀가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들하고 나하고는 차원이 달라. 내가 몇 마디만 놀리면 사람이 한 평생 동안 쌓아 놓은 평판과 명예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또 내가 몇 마디 하면 아주 절친한 친구 사이라도 하루아침에 원수지간이 돼 버린다네. 또 너희들은 몇 번 쓰고 나면 녹 쓸고 이가 나가지만 나는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날카로워진다네"라고 했답니다.>

(군대에 있을 때의 경험 - 점점 험악해지는 말, 급기야 욕설이 입에 담겨지려고 해)

만일 우리가 우리의 혀를 통제하지 않고 그냥 두면 어느 정도까지 가게 되는가하면 8절 말씀에 우리의 혀가 쉴 새 없이 악을 내어놓다가 그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실제로 롬3:14에는 심판이 예비 된 죄인의 여러 현상 중에‘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시편 기자의 기도처럼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의 문을 지켜달라’(시141:3)는 기도를 무엇보다 중요한 기도 제목으로 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학자의 혀를 내게 주어 곤핍한 자를 적절한 말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사50:4) 즉, 덕을 세우는 말만 할 수 있기를 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덕스러운 말, 선한 말, 축복의 말을 합시다. 조금이라도 더러운 말, 저주의 말 악한 말은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즉, 은혜스러운 말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2. 말에 오해하지 맙시다. 정확하게 그 말의 뜻을 파악하기 전에는 판단도 결론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말은 하는 사람만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듣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하는 사람만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듣는 사람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1)유리창 깨끗이 문떼라(?)
부산으로 전학 온 서울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벌 청소를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이 유리창을 닦고 있는 이 학생을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리창 깨끗이 문떼라”
나중에 선생님이 교실에 와 보니 모든 유리창을 다 떼어 놓았더랍니다.

*예2)삼국지의 조조
삼국지에 보면 조조가 적의 위협을 받고 쫓겨 가는 가운데 그의 친척집에 피신합니다. 그의 친척은 조조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가운데 술과 음식을 구하기 위해서 나갑니다. 조조와 함께 도망쳐 왔던 사람이 방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부엌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요놈을 잡을까 저놈을 잡을까”
조조는 자기들을 죽이려는 줄로 알고서는 칼을 뽑아서 부엌에 있는 그들을 다 죽여 버립니다.
죽이고 난 뒤 보니 부엌에는 돼지들이 있었습니다.
잘못된 오해로 자기들을 선대해 주려는 사람들을 어처구니없이 죽이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3)어느 사모님의 오해(고신대 이병수 목사님의 글을 인용)
어느 교회의 목사 사모가 주일 예배 후 성도들에게 인사하는 자리는 2층과 1층 계단 사이였습니다. 계속 같은 자리에서 수년을 인사하다 보니, 비우면 궁금해서 찾는 분들도 있고 텅 빈 것 같다는 느낌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날도 한복을 입고 여전히 인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성도 한 분이 “사모님, 왜 여기 서 계십니까?”하고 말했습니다. 사모님이 깜짝 놀라서 “왜요? 잘못됐나요?”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색을 하면 “물론이죠” “아 그래요?…” 이것으로 대화는 끝이 났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내려가는 길이라 더 이상 이야기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모의 마음은 그때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왜 잘못됐다고 했을까?’ 노골적으로 나에게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그 사람은 서울대학을 나온 엘리트인데다가 회사 사장이었고 최근에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으로 순수하고 분명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눈에 뭔가 비합리적이라든지, 문제가 되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성도들이 한꺼번에 내려오는 시간이라서 그 흐름을 방해하는 자리에 왜 서있느냐는 말인가? 아니면 예쁘지도 않는 사모가 왜 거기 서서 설치고 있느냐는 말인가? 거기에 서서 인사할 뚜렷한 의미가 없으니 다시 생각해 보라는 의미인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음주부터 그 자리에 내가 서지 않느냐? 아니면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대로 종전대로 서느냐?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전화를 했습니다. 다른 진단과 대안을 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말 불쾌할지라도 그의 의견이 옳다면 단호히 고칠 각오를 하고 말입니다.

“사모님, 웬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반갑게 전화를 받는 그에게 “낮에 저를 보고 거기 서 있지 말라고 하신 것 기억하세요? 이유가 무엇인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아 예, 오늘 같이 좋은 날, 목사님의 아이보리색 양복과 사모님의 벽돌색 한복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목사님 곁에 서 계셔야지 좋지 않습니까? 날마다 목사님은 저쪽 문간에 서 계시고, 사모님은 1층과 2충 사이 계단에 서 계시는 것이 외로워 보여 진심으로 제안을 한 것입니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그 성도는 사모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좋은 의도의 말을 듣고 즐거워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그토록 고통스러워 한 것은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사모가 그 분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지 않았다면 그 사모는 그 말로 인해 일평생 상처와 짐을 지고 살았을 것이며, 두 사람의 사이도 결코 좋아질리 없었을 것입니다.

3. 말을 전하는 사람의 책임이 중합니다.
속담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험담이라고 하면 자신의 것보다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특성 중에 하나입니다.
잠18:8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 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딤전5:13에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이런 사람은 그 다음 5:14절에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주는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의 말로 잘못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책임을 그 자신도 회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듣기는 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은 그 말을 또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옮겨도 그대로 정확하게 옮기면 문제가 안 되는데 옮기면서 자기의 생각을 더해서 옮기게 됩니다.
*이전 보이스카웃에서 ‘말 전달하기 게임’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천국시민의 말 사용의 원칙을 이렇게 교훈해 주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4. (상처 주는 말을 하지도 말고) 말에 상처를 받지도 맙시다.
성숙한 성도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상처 될 만한 말에도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은 더욱 성숙한 성도입니다. 그 사람이 말에 상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포용력이 있다는 말이며 무슨 말을 들어도 소화시켜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은 아무리 줘도 받지 않으면 준 사람이 도로 가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이 아무리 상처 되는 말을 한다 해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접수하지 않으면 그것은 한 사람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1)‘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약1:19) 합시다.
우리가 잘 듣고 조금만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게 되면, 우리가 말로 인해 저지르는 실수의 90% 이상 방지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곧 바로 그 말을 받아 대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을 받을 당시에는 분한 것이 있고 답답하더라도 조금 더 돌이켜서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다른 여러 각도에서 그 말의 의미를 새길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또 그 말의 본 뜻은 무엇인지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을 벌고 나면 처음에 대단한 것으로 여겼던 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말을 더디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2)그 사람을 더욱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상처 많은 영혼이 상처를 주기도 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말로써 상처를 입히면서 자신이 연약한 자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의 연약함을 도리어 감싸 안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15:1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3)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도무지 나의 그릇이 다른 사람을 가슴에 품고 기도해 줄 정도가 되지 않으면 이제 그 분함의 갚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 때문에 원수가 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원수 갚음이 나에게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롬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내가 스스로 대응하려다가 나도 실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거의 틀림없습니다. 악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결론:
야고보서는 우리의 입술이 오직 하나의 목적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없는 이치이며, 무화과에서 감람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합니다.(약3:9-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혀가 제대로 거듭나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는 그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를 제단의 숯불로 그의 입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입술의 정결함을 회복하지 않고는 주님의 자녀로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이후로는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의 삶의 현장에 주어진 혀의 권세로 복음을 전하며 축복을 선언하여 복음의 왕성함과 복의 충만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주후 200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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