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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부활에 관한 천사의 세가지 메세지
  • 날짜 : 2006. 04. 9
  • 본문 : 마28:1-10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기독교의 최대의 명절입니다. 부활절이 기독교의 최대 명절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피부로 느끼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상대적으로 성탄절에 대한 집중적 관심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세상이 성탄절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고 떠드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세상이 어떻게 하든 관계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서 제자들에게 먼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다가 곧이어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의 우선적인 관심은 제자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고백하는가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부활에 관한 우리의 관심을 부활의 첫 새벽에 여인들이 보았던 부활의 현장에 집중시키십니다. 인생이 해결해야만 하는 가장 큰 문제인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신 그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부활의 현장에서 천사를 통하여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금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그의 시신이 들어간 것을 여인들이 목격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실 때 은혜를 받고 예수님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온 몸에 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그렇게 처참하게 죽으신 것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에 이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 무덤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허락을 해 줄 것인지, 또한 무덤을 막고 있는 큰 돌은 어떻게 할 것인지… 그러나 이 여인들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그런 것이 무덤으로 가지 못할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이와 같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부활의 현장을 제일 먼저 목격하는 영광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을 때, 땅이 흔들렸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옮겨졌고 번개 같고 눈 같이 흰 모습의 천사는 그 옮겨진 돌 위에 앉았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벌벌 떨고 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여인들도 함께 떨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에게 천사는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여기에 부활을 맞는 우리의 자세가 들어 있습니다.



1. “무서워 말라”(5)고 말하였습니다.

부활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 최대의 기쁨의 소식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인생들이 그렇게도 풀기를 원했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풀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고 가는 것인가?  왜 인간은 이렇게 살다가 가야만 하는가? 왜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가? 인간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인가?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의 일로 지금도 고민하고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죽어서 겪게 될 일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을 한 번도 어기신 적이 없으신 예수님이 “이 잔을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고 몇 번씩 하나님께 물으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또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게도 목숨이 아까웠던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어떤 사람은 이웃을 위하여, 또 어떤 사람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다른 나라 사람을 위해서도 지하철에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 사람들보다 비겁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가 바로 죽고 난 뒤 우리가 겪어야 할 그 모든 일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사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망이란 단지 목숨이 끊어지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목숨이 끊어지는 것은 너무나도 편하고 쉬운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이 육신의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살을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죽은 다음에 있을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죽음 다음에는 심판이 있고 지옥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의 목숨을 구한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 심판 받고 지옥 갈 우리를 구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우리는 천사가 이 말을 여인들에게만 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4,5절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며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무덤을 지키던 자들은 무서워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살전4:16에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죽은 자들의 영혼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일어날 죽은 자들의 영혼에는 구원을 받은 영혼도 있을 것이고 받지 못한 영혼도 있을 것입니다. 요5:29에는 생명의 부활이 있고 심판의 부활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 믿지 않은 영혼들은 심판의 부활을 맞이할 것입니다. 두려워 떨면서 죽은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여인들에게는 “너희는 무서워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무서워하고 떨었던 사람은 무덤을 지키던 자들이었는데 천사가 지키던 군사들에게 무서워 말라고 한 것이 아니고 여인들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여인들도 두려워했기에 천사가 이런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덤에 온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실 때부터 지금까지 이길 수 없는 공포와 가슴이 찢어지듯 한 고통을 느끼며 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그의 권위있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고 치유의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그의 나라에 이를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경험하는 이 현장은 꿈이기만을 바라지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 충격은 남은 그들의 일생까지 비참하게 만들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두려움과 고통 속에 그들은 일평생 시달리며 그들의 생을 마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믿는다면 혹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이상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떨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모든 두려움과 공포는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 떨쳐 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예화)1815년 6월 영국 해군과 불란서 해군이 워터루에서 대전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근 200년 전이었기 때문에 무선 시설이 발명되기 전이어서, 범선에서 보내는 신호를 해안에서 육안으로 식별하는 것으로 전세(戰勢)를 판가름할 때였습니다. 영국 국민은 해전을 치르고 있는 웰링턴 장군으로부터 보내오는 전쟁의 결과에 대한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바다에서 싸우고 있는 범선으로부터 신호가 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호의 내용은 “웰링턴이 패배했다”는 비보였습니다. 전 영국 국민은 패배감과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웰링턴이 패했다”는 비보를 전하고 난 후 바다는 자욱한 안개로 뒤덮혀 버렸습니다. 이 소식은 즉시 전 영국에 퍼졌습니다. 남편이나 자식을 전쟁터에 내보낸 아내나 부모들은 통곡을 했고, 영국 왕실도 비통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난 후 바다의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배로부터 다시 신호가 왔습니다. 그리고 그 신호의 내용은 “웰링턴이 적을 패배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곧 전 영국에 퍼졌습니다. 전 영국 국민이 길거리를 뛰쳐나왔고 기쁨으로 날뛰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우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시고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셨던 그 시간은 "예수가 패했다"는 슬픈 소식이 입과 입을 통하여 예루살렘과 갈릴리에 퍼졌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주일 새벽 빈 무덤을 발견한 제자들과 여인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가 사망을 패배시켰다."는 소식이 전파 되면서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새 역사의 아침이 밝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가 사망에 패했다"가 아니라 "예수가 사망을 패배 시켰다"는 승리의 소식인 것입니다.



2. “그가 여기 계시지 않다…와서 보라.”고 말하였습니다.(5-6)

마28:5-6.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천사는 이들의 잘못된 방문 이유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인들은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찾아 왔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계십니다.

천사들이 했던 말을 눅24:5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천사)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자신의 주(主)로 죽은 자를 찾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석가도 죽었고 공자도 마호멧도 죽었습니다. 북한에서 신처럼 떠받들던 김일성도 죽어 특수처리 되어 보관되어 사람들이 그 시체를 보며 참배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 분의 시신이 놓여져 있는 곳을 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그의 시신이 없어졌지 않느냐’라는 것 이상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와서 보라”는 천사의 말에 여인들은 들어가서 보았다는 말은 없고 8절에 여인들이 두려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에서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러 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요한복음에 보면 여인들에게서 무덤이 비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뛰어 무덤으로 들어가서 이 모든 것을 자세하게 본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베드로와 요한 자신입니다. 요한은 무덤에 들어가 보고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20:4-8)

베드로와 요한이 본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그 곳에 없었다는 것, 그 정도가 아닙니다. 천사가 보라고 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의 누우셨던 것을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의 시신을 샀던 세마포가 놓여 있었습니다. 머리를 둘렀던 수건은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에는 요20:7을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비가 그의 허물을 벗고 나온 것처럼 예수님의 시신을 샀던 세마포와 머리의 수건은 그대로 있고 예수님의 몸은 그대로 빠져 나온 그 자리를 본 것입니다.

<요한이 이렇게 기록한 것은 자신의 겁 많음을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를 더욱 명확하게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보았고 자신도 분명히 확인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두고 그게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살 수가 있느냐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답이 “그게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느냐면~ ” 이런 게 전혀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믿는 것입니다. 이건 과학적 설명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 누우셨던 자리를 보니 부활하셨다!

나중에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가 부활하신 것을 보았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오늘날의 신앙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어떻게 믿냐? 하나님이 눈에 보이냐?”

그런 말에도 우리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고, 내가 힘들고 피곤하고 지칠 때 힘을 주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 역사하시고 찬송을 부를 때 감동을 주십니다. 내가 그 응답을 받고 그 능력을 받고 사는데 누가 있니 없니 말할 수 있습니까? 이미 논리와 합리, 과학을 떠나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하고 동행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핸드폰으로 다른 사람과 통화하고 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너 도대체 무슨 말을 혼자 그렇게 하고 있냐?” “아뇨 난 서울에 있는 내 친구하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요.” “뭐 서울에 있는 네 친구하고? 보지 못하는 친구하고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냐?” “이 기계가 다른 친구하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해 줘요?” “웃기고 있네. 네 친구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있다면서. 정 그렇다면 이 기계가 어떻게 해서 그 친구하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만드는지 설명해봐.” “그건 몰라요.” “그것 봐 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누가 틀린 것입니까? 기계에 대해 아무 것도 몰라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내 친구하고 통화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 “주 하나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다 사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나의 구세주,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 근심 전혀 없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3. “빨리 가서 말하라”(7)고 하였습니다.

7절 영어 번역본들. “빨리 가라 그리고 말하라”로.

그들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빨리.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이 부활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지역에 전하려고 합니다. 부활의 산 소망이 이 지역을 모두 덮기를 기도하는 심령으로 이 일을 감당합시다.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의 신앙 고백의 중심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특히 부활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구원사역의 절정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핵심으로 고백합니다.

사도신경 - 예수님의 부활을 먼저 고백하고-“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나중에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

제자들처럼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의 삶이 더욱 담대하고 힘있는 삶을 살도록.

-아멘-(주후2006-04-16 부활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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