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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전예배

요셉지파의 불평
  • 날짜 : 2006.11.5
  • 설교자 :
  • 본문 : 여호수아 17:14-18
성경본문 및 요약
지난주일은 여호수아가 정복한 땅을 제일 먼저 유다 지파에게 분배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새겼습니다. 오늘은 유다 지파 다음으로 요셉 지파입니다. 16장을 건너뛰고 17장도 앞부분을 건너뛰었습니다. 16장은 요셉의 둘째 아들인 에브라임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며, 17장은 요셉의 첫째 아들이 므낫세 지파가 분배받은 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는 이들 두 지파가 이 분배받은 땅에 대해서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셉 지파라는 말과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라는 말에 대한 정리부터 하고 시작해야겠습니다. 이미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야곱의 12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12아들의 이름이 12지파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이름으로만 말하자면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아들이기 때문에 지파의 이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손자이지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에게 지파의 이름을 준다면 다른 아들들에게서 난 자식들에게도 모두 한 지파로서의 인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브라임, 므낫세 지파라는 말을 들어봤지만 그 외 야곱의 다른 손자의 이름으로 된 지파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요셉 지파라는 말도 그렇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야곱의 12명의 아들 중에서 요셉은 두 분깃을 받아 아들들의 이름으로 새 지파명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마지막 죽기 직전에 자신의 12명의 아들들에게 축복을 하면서 요셉에게는 한 분깃을 더 준다고 하였습니다.(창48:22) 그 두 분깃은 그의 두 아들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요셉 지파가 두 몫을 받는 대신 레위 지파는 몫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은 12지파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요셉 지파는 다른 지파가 누리지 못한 큰 혜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땅을 분배받은 사건을 기록할 때도 16장 5절부터는 에브라임 지파의 경계를, 17장부터는 므낫세 지파의 영토를 분명하게 나누어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지파를 통합한 이름은 요셉 지파이며 각각을 나눌 때는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분배 받은 이 요셉 지파에게 불만이 생겼습니다. 실제 이름만 두 지파이지 분배 받은 땅은 한 분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지파의 경계가 정확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땅을 분배받은 것이 아니라 같이 붙어 있는 땅을 양분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4절은 바로 그 부분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제비를 뽑을 때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한 번의 기회만 주어졌습니다.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쉽게 말하면 우리는 이렇게 큰 지파가 되었는데 왜 한 분깃만 주십니까? 사실 우린 두 분깃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요셉 지파,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이 주장의 부당함을 분배 당시의 상황보다 그들 지파의 시조인 요셉의 시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교훈을 받겠습니다.

1. 요셉지파는 공로의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 요셉 지파들의 불만은 그들 지파의 시조인 요셉이 이스라엘 전체에게 끼친 공로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다른 지파에 비해 적은 땅을 분배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분배받은 땅이 황무지나 사막도 아닙니다. 그들은 좋은 땅을 받았습니다. 단지 왜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따져보면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반(半) 지파가 요단 동쪽을 이미 분배를 받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 이미 크게 한 몫을 떼 놓고 시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 지파만큼 특별한 대우를 받은 지파도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두 분깃을 주지 않느냐고 억울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조상 요셉이 자기 민족에게 끼친 공로를 아직까지 특권의식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 요셉에게 분명 야곱이 두 분깃을 허락하지 않았는가? 왜 우리는 이제 와서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누구 때문에 우리 민족이 살게 되었는데? 우리 민족은 이미 400년 전에 이 땅에서 굶어 죽었어야 할 백성이 아니었는가? 누구 때문에 다시 이 땅을 밟게 되었는데?”

어쩌면 이미 그들은 분배 받은 순서에서부터 유다 다음이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 지파는 언제부턴가 유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유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지난주에 받은 말씀에서 그는 며느리와의 관계 속에 아이를 낳은 사람입니다. 낯 뜨겁게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의 지파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에 비해 요셉은 말 그대로 에프엠입니다.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이 자랐습니다. 그리고 형들의 부당한 대우에도 형들 탓을 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너무 완벽한 사람이 요셉입니다.

가끔 성경 인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어볼 때 여러분은 누구를 말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군사문화와 교육제도 속에서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산 세대는 자신들의 좋아하는 인물이 아닌 강요된 인물을 모델로 삼게 됩니다. 그땐 거의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이 1, 2위를 다투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재빠르게 성경에서 가장 범생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답은 분명해집니다. ‘요셉’ 예수님을 말하기에는 그 분은 하나님이시니까 제외되고 답은 요셉입니다. 그런데 절대로 그렇게 답을 못하겠는 것입니다. 왜요? 요셉하고 나하고는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이런 사람있는가 싶습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형들에게 팔려서 다른 나라로 갔는데 형들 원망하지 않고, 억울하게 강간범으로 죄수가 되었는데도 또 잠잠하고... 인내하고 또 인내하더니 결국 당대에 최고의 부국 애굽에서 총리가 된 사람입니다. 정말 범생 중의 범생입니다. 결정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굶어죽게 생겼는데 자신의 총리권세로 자기 집안을 구원한 사람아닙니까?
요셉의 자손들이 정말 어깨에 힘줄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이 되지 않고 자신의 공로가 되면 불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요셉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 요셉이 처음에 고백했던 대로 고백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창 45:7-8)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인간적으로 자신이 좀 더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모습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뭔가 좀 갖춘 것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은혜가 없습니다. 공로의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데, 이래 뵈도.... 이러면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요셉 지파처럼 자신을 잘 알아주지 않으면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섬기는 모든 일들은 은혜로 감당하는 일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은혜가 빠져나가면 어느 샌가 공로가 되어버립니다.
사람들 별 수 없습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하는 일이 둘 중 하나입니다. 불평, 불만을 쏟아내 놓습니다. 안 그러면 떠납니다.
예)반여동 교회 중직자 이야기 - 자신의 부족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에 불만을 토하고 분열을 시키고 나간 사람의 말로가 좋지 않다.

2. 요셉 지파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요셉 자손들이 유다 지파와 비교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면 그들은 현재에 가진 것으로는 대항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있었던 것 중에 괜찮은 것을 가지고 가야하는데 결국 확실한 것이 그들의 조상 요셉의 공로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 지파 이름을 보라. ‘요셉’이지 않는가!
지파의 시조를 말해서 기분이 나쁘냐? 그러면 공통 조상인 야곱을 생각해 보자. 야곱 할아버지가 네 명의 부인 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했느냐? 우리 할머니 아니냐! 누구입니까? 라헬입니다. 얼마나 예뻤든지 야곱이 7년 속은 세월도 아깝다하지 않고 또 다시 7년을 외삼촌 집에서 죽으라고 일을 해서 얻은 아내입니다. 이 아내를 위해 일하는 세월은 지겹지도 않아 칠년을 수 일같이 일을 했습니다.
혹 서열을 지킨다고 하여 장자인 르우벤 지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하면 그래도 이해가 갑니다. 어찌 유다지파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요셉의 후손의 의문이 아니라 나의 의문이기도 했습니다.
‘르우벤이 아니라면 요셉이어야지 왜 유다인가?’하는 문제는 사실 제가 가진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왜 마지막에 야곱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에서 났고 자신의 가문을 아사(餓死) 직전에 구원한 요셉에게 이스라엘의 정통성을 잇게 하지 않고 왜 유다를 택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가 마지막 자식들에게 축복을 할 때는 그의 생애의 말년이었을 때였습니다. 사람의 생의 말년에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야곱도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애굽의 바로 왕 앞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창47:9)
야곱의 일생을 한 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험악한 세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던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출생부터 그랬습니다. 그는 형으로 태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동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장자권만 얻으면 축복받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때부터 고생길이었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원했던 신부는 절세미인 라헬이었는데 자고 일어나 보니 보기도 싫은 언니 레아였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많이 낳고 싶었는데 원했던 라헬은 아기가 없고 왜 그렇게 못난 레아는 아들도 그렇게 쑥쑥 잘 낳는지요. 외삼촌 밑에서 결혼으로 속고, 또 임금으로 속고, 고생은 바가지로 하고. 이제 겨우 한 밑천 잡아서 고향으로 가 행복하게 살려고 했더니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 라헬이 낳은 늦둥이 요셉이 죽어버리고. 그런데 말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나중에 애굽에 총리가 되어 나타나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 인생’은 세상적으로 표현한 말이고 이것을 신앙적으로 표현을 다시 하면 이 말을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야곱이 마지막에 깨달았던 것은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집니다.”였습니다.

남자들이 늙으면 자신의 아내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잔소리 안 하고 건강하게 살아주면 그것만큼 고마운 것이 없는 것이지요. 라헬은 아기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히스테리가 얼마나 심했는지 모릅니다. 창30장에 보면 그는 언니 레아를 구박합니다. 남편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기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는 남편 야곱에게도 불평을 했습니다. 그것이 집안을 항상 평안치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창 30:2)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그러나 언니 레아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는 예쁘지 않는 여인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버림받듯이 산 여인입니다. 그녀가 아이를 많이 낳았다고 했지만 사고 친 녀석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안그래도 남편에게 눈치를 보면 사는데 아이들까지 난리입니다. 큰 놈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을 건드리고, 딸 디나는 세겜 족 추장에게 추행을 당하고 둘째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그것이 분해서 깡패처럼 세겜 족들과 싸움을 걸어 집안이 밤새 도망하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유다는 늦게 뭔 노망인지 며느리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버립니다.
여러분, 그러나 남편에게 버림받듯 산 레아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돌아보셨습니다. 이미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고 있다는 표였습니다.
남자의 사랑하나만 믿고 사는 여자는 얼마나 깍쟁인지 모릅니다. 이기주의자고 다른 사람 생각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을 남자가 없었던 레아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자식들 사고 속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으면서 신앙의 사람이 되어 간 것입니다. 바로 그가 낳은 아들 가운데 유다는 그 가문의 영적 정통성을 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보호 속에서만 산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레아는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자녀가 지금 잘 된다고 교만하지 말고 지금 못된다고 절망하시 마십시오.
예)성화-프란체스코 하이예츠의 <야곱과 에서의 만남>

야곱이 그렇게 원했지만 하나님이 첫 부인으로 라헬을 주지 않고 레아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레아의 소생이 이 가문의 정통성을 이어가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말년에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뜻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요셉 지파는 그들의 조상 요셉이 깨닫고 고백했던 이 신앙을 그들도 고백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에 순종할 수 없고 결국은 가득한 불평, 불만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있는 복 마저 놓치고 더욱 황폐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3. 요셉 지파에게 도전의식(개척정신) 없었습니다.
도전할 것이 없으면 불만이 생깁니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았고 그들의 대적이 강하다고 생각할 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그 어떤 위험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겐 대부분의 가나안은 정복이 되었다는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누리는 것만이 남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누려야 합니다. 정복한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만큼 바보스런 일이 없습니다. 정복은 누리기 위해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싸움이 끝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여전히 미정복지를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땅을 다 정복했기 때문에 분배한 것이 아닙니다. 수13:1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 그 남은 땅은 이러하니…"
여호수아의 역할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각 땅을 분배를 하고 난 뒤에 각 지파가 소속된 지역의 미 정복지는 각 지파가 정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지파가 그들에게 분배된 지역에 있는 미정복지를 그냥 그대로 놔 둔 지파가 많았습니다. 요셉 지파 역시 그렇습니다. 16:10, 17:12

여호수아가 불평하는 요셉지파에게 한 말이 무엇입니까? 15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그러면 요셉 지파는 깨닫고 정신무장을 다시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하는 말을 보십시오. 16절.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

전혀 싸울 의지가 없습니다. 싸워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들의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불평과 불만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전에 우리나라에 IMF가 왔을 때, 외국의 방송들이 우리나라를 향해 진단한 대표적인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을 남겨두고 있었지만 그 정복지는 너무 우습게 보았습니다. 그들도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리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마지막 죽는 날까지 달리고 또 달린 사람입니다. 빌3:12-14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성도 여러분, 우리도 새롭게 달려 가야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정복의 이 명령이 완전히 성취되는 때는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입니다. 다윗 왕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영적인 전쟁을 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최종의 승리는 이스라엘이 다윗의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했듯이 이제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의 전쟁은 끝이 날 것입니다.
전쟁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만 감격적인 일이 됩니다. 나의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전쟁할 때 놀며 수수방관했던 사람에게는 승전보가 전해지는 날은 부끄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 아 멘 - (주후 2006-11-05)
주일오전예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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