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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바와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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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및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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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바나바와 같은 사람
성경> 행11:19-26
찬송> 471, 523장


●주연(主演)보다 조연(助演)으로
성도 여러분, 며칠 전에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영화제인 제 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우리나라의 이창동 감독의 작품 ‘오아시스’가 감독상과 신인 배우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권위 있는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으니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되었지만 사실 영화제마다 가장 큰 관심사는 주연상을 누가 받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주연만 있어서는 영화가 될 수 없습니다. 조연이 있어야 주연이 주연다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연의 역할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습니다.

6월에 월드컵 축구가 끝이 난 다음에 국가 대표 선수들의 포상금 지급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협회에서는 주전과 후보를 차등해서 지급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론과 특별히 주전 선수들이 반발했습니다. 그들은 만약에 주전과 후보를 차등 지급하면 포상금을 모두 모아 자기네들끼리 똑같이 나누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잘 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고생한 덕택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성경에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주인이 종 셋에게 각각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를 주고 떠났는데 그들이 장사하여 남긴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5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5달란트를, 2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또 2달란트를 남겨 주인에게 가져왔지만 1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땅에 뭍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심한 꾸중과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주로 5달란트에 자주 가 있습니다. 2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똑 같은 칭찬을 들었지만 왠지 우리의 관심은 2달란트보다는 5달란트에 가 있습니다. 역시 많은 달란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에게 우리의 관심이 가 있는 것은 아닌지.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조연과 같은 한 사람에 대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화려하지 않지만 정말 그가 없었다면 복음의 역사, 교회의 역사도 달라질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바로 ‘바나바’입니다.

사실 우리가 조금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을 보면, 바나바의 역할은 정말 위대합니다. 그러나 그가 바울보다 베드로보다 우리에게 더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그의 조연(助演)적인 역할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조연을 포기하고 주연이기를 바랐다면 우리는 더 많은 바나바의 기사를 성경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조연의 아름다움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의 평가는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조연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준 ‘바나바’의 모습을 함께 나누면서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또 이 시대의 바나바의 출현을 기대해 봅니다.

그러면 먼저, 바나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의 특징을 4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그는 평신도에서 사도의 반열에 오를 만큼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라는 명칭은 먼저 예수님의 12제자에게 해당되는 용어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12제자 외에 ‘사도’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은 과당치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면서도 사도라고 일컫는 사람이 있는데 첫째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그의 서신에서 예수님에게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울 외에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제자가 아니면서도 사도라고 불려진 또 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우리는 바나바에게 사도라는 명칭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베드로 사도, 바울 사도는 익숙하지만 바나바 사도? 무엇인가 어색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 사도였습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그가 바울과 함께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그는 사도라 불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 사도로 인정받는 과정은 차이가 납니다. 바울은 자신 스스로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지만(물론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 다른 사람이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도 않아 사역에 지장을 받았기 때문에) 바나바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정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행 14장에서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를 함께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누가 자신의 판단은 아닐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사도라는 명칭을 누가 개인이 붙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바나바는 성도들과 다른 사도에 의해 충분히 사도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을 받았고, 이 사실에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기에 누가는 바나바를 사도로 기록한 것입니다.

또 우리는 바나바가 얼마나 사도들에게도 신임을 받았는지를 행9:27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행9:27에 사도들이 의심하고 있는 사울을 사도들에게 데려가 그의 회심의 진실성을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이 바나바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즉 ‘바나바가 인정하면 그 사람은 진짜다’라고 할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

바나바는 교회 지도자들과 모든 성도들에게 인정받는 평신도였지만, 그는 사도로서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부르신 것을 아니었지만 초대 교회 공동체는 그를 사도로 인정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평신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평신도로서 지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도 인정을 받으시고, 또 성도들에게서도 인정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안민 장로 - 그는 목회자가 아니라 장로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목회자에게서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은 그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와 성도들에게서 공히 인정을 받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 사람을 특히 칭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도 문제가 있고 약점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이런 사람이 많습니다. 목사 이상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것과 교회를 섬기는 것에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 헌신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전도에, 어떤 분은 가정사역에, 어떤 분은 상담에, 어떤 분은 청소년 사역에…
(10월 초에 우리교회 강사로 오는 이종근 장로님도 그런 분들 중 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에도 이런 분들이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여러분이 이런 분들과 같이 세워지기를 축원합니다.

2. 바나바는 수용성 있는,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피난을 갔는데 이들은 피난 간 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대개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이방인 출신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보자 생각하고 복음을 전했더니 놀랍게도 이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있어납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안디옥에 기존 몇몇 믿는 사람 중심으로 모이던 교회가 놀라운 부흥을 하게 되었고 이 소문은 예루살렘에도 전해 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사찰하기로 하고 보낼 사람을 물색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적절한 인선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다른 사도들 중에 한 사람이 대신해서 안디옥에 갔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상상이지만 그러나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상상인데 사도들은 종교적인 열광 상태를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째 그들은 유대적인 사고에 깊이 젖어있었고, 또 이방인이 나타내는 열광적인 종교 행위는 거부감이 먼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바나바는 유대식 사고의 틀에 박혀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이 이방 도시에도 임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랬기에 바나바는 이 갑작스런 부흥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새 신자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결심합니다. 이 안디옥에 남기로 말입니다. 그는 안디옥에서 새 신자들을 지도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새어머니의 역할을 잘 하는 사람은 열려있는 사람입니다. 이전 자신의 자식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배에서 태어난 아이를 잘 양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열려진 사람, 즉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이 잘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세밀하게 배려하여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낯선 사람이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따뜻한 말로 인사하며 상냥하게 대해 주는 사람, 이 사람이 그 교회의 얼굴이 되는 교회는 복된 교회입니다.

3. 그는 위로자였습니다. 즉 사람을 격려하여 일군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회초리보다는 칭찬과 격려가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인재를 양성하는데도 역시 그렇다고 합니다.
예)제너럴 일렉트릭사의 회장이었던 잭 웰치는 그의 경영 신념의 많은 것들을 어머니에게서 배웠다고 술회한다. 특별히 그가 많은 어려운 경영의 난제들을 풀어나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자신감은 그의 어머니가 심어준 것이다. 4개의 A와 1개의 B를 받은 성적표를 가지고 오면 어머니는 먼저 왜 B를 받았느냐고 물으셨다.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언제나 A를 받은 것을 축하하며 그를 안아주었다. 어머니는 그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받는 사람인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또 어린 웰치는 말을 더듬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가끔씩 말을 더듬어서 낭패를 당하거나 우스운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가 말을 더듬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었다.
“그건 네가 너무나 똑똑하기 때문이지. 어느 누구의 혀도 네 똑똑한 머리를 따라갈 수는 없을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바나바의 역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향한 그의 뜨거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그의 고향 다소로 내려가서 있었습니다. 그 세월이 약 10년 정도로 보여 집니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그렇게 자기의 고향에서 복음 사역을 하다 일생을 보낼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일선의 사역자로 등용시킨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흥하는 안디옥 교회의 사역에 또 다른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생각해냈습니다. 직접 다소로 찾아가서 바울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이 된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처음 회심하고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혔을 때에도 사도들이 경계하고 인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바울의 회심의 진실함을 말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등용하여 동역한 사람입니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을 수 있었던 사람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의 차이를 더욱 알 수 있습니다.
마가는 바울이 도저히 함께 동역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호히 끊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를 용납했고 2차 전도여행에 데리고 갔습니다.
결국 나중에 바울도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하면서 마가 요한의 유익함을 인정하고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어찌 무익한 사람이 갑자기 유익한 사람이 되었겠는가? 그것은 바로 바나바의 역할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잘 인내하지 못하는 이 마가를 데리고 다니면서 위로와 격려로 훈련을 쌓게 했고 결국은 복음에 유익한 사람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그의 별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요셉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바나바’로 불렀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의 뜻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이 별명을 본명처럼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자비와 긍휼의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4. 바나바는 복음 전파의 목적을 위해 산 사람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의 기록 중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중요성에 따라 그 사람의 이름과 지명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이 거론 될 때에 한결같이 베드로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 안디옥 교회는 부흥 성장하여 선교사를 파송합니다. 그 선교사로 놀랍게도 그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바나바와 바울을 보내기를 결정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만 해도 ‘바나바와 바울(사울)’로 성경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행13:2) 그러나 바보에서 배를 타고 떠날 때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로 바뀌어 나오고 있습니다.(행13:13)
이것은 바나바가 그 전도여행의 주도권을 바울에게 넘겼다는 의미입니다. 바나바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항상 그에게 먼저 기득권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사람이고 바울을 자신이 천거해서 등용시킨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선배가 어디에 있고 후배가 어디에 있나? 복음만 효과적으로 잘 전하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할런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질서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하나님은 먼저 질서를 더 중요하게 여기실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질서를 무시하다가 결국 복음을 아예 전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선교지에서 많은 경우 이 기득권과 주도권의 문제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을 봅니다. 그래서 아예 망쳐버리느니 조금 덜 효과적이더라도 질서를 유지해 가는 것이 더 낫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역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때입니다. 포기하고 본래 하고자 했던 일에 목표를 두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한 사람이 바나바인 것입니다. 바나바는 복음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행14:12에 아주 재미 있는 기사가 있습니다. - 바나바는 쓰스(Zeus), 바울을 허메(Hermes)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하면서 루스드라라는 곳에서 나면서 앉은뱅이 된 한 사람을 바울이 고쳐줍니다.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라고 외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루스드라의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을 입고 땅에 내려온 것이라’고 하면서 바나바는 쓰스라고 하고 바울은 허메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 제우스신을 말합니다. 허메는 헤르메스 즉, 제우스신의 대변자였습니다. 즉 신의 명령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일은 바울이 다 해 놓았는데 사람들은 바울을 제우스라고 말하지 않고 옆에 있는 바나바를 제우스신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바나바는 그 외모에서 아무래도 뭔가 기품이 있고 고결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사는 데는 이런 것을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축구 대표 선수를 해도 안정환 선수의 이미지가 다른 선수들의 이미지와 다른 것입니다.
그 위풍, 기풍을 볼 때에 바울보다 바나바가 훨씬 더 낫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바울은 그의 종노릇할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이런 것들 때문에 복음을 그르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무엇이 더 유익한가 - 즉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는데 내가 나서는 것이 유익한가 아니면 바울이 나서는 것이 유익한가 -를 생각하고 복음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 바나바!
결과적으로 종합하여 말한다면 바나바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24절 말씀에 바나바라는 사람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무슨 말씀입니까? 첫째, 그는 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즉 인격(성품)이 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입니다. 즉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24절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 다음 남은 구절에 있습니다.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중요한 요소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나바라는 사람의 기여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바나바의 인격적인 면과 신앙적인 면을 소개했다는 것은 한 교회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고매한 인격과 신앙에서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즉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그 사람 믿음 좋다’ 이것만으로 안 됩니다. ‘그 사람 된 사람이야!’ ‘인격이 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 좋은 것과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 좋고 교회 열심히 나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비판거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감동하는 것은 신앙이 밑바탕에 깔린 선한 행실입니다. 고매한 인격입니다.

이제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주연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더 기뻐하고 복음이 드러나는 일이라면 자신의 조연됨을 감사하는 오늘의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바나바의 그 아름다움을 사모하시고 기도의 제목이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 -(주후 2002.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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