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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지파의 분배 받은 땅
  • 날짜 : 2006.10.29
  • 본문 : 수15:1-12 (구약342P)
  • 설교자 :
성경본문 및 요약
오늘 성경 본문 15장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정복한 가나안 땅에 대한 정식적인 분배가 이루어집니다. 사실 정복지에 대한 분배는 이미 14장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단강 동편 땅에 대한 분배였습니다. 그 땅은 본래 하나님이 처음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식적인 분배가 본장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약속의 땅을 제일 먼저 분배 받는 지파가 어떤 지파인지에 대한 관심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이 분배 받은 땅의 성격을 보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셨던 것은 무엇인지를 아울러 보겠습니다.



1. 신앙생활의 패배주의, 열등의식을 돌파하라.

그런데 땅의 분배를 시작하면서 분배의 제 일 순위는 유다지파입니다.

(수 15:1)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남단은 에돔 지경에 이르고 또 남으로 신 광야까지라”



왜 유다지파입니까? 이스라엘 12지파는 야곱의 열 두 아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중에 유다는 네 번째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은 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가정 내에서도 서열은 분명합니다. 특히 장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심은 우리나라보다 더 특별합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는 장자에 얽힌 사연들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지만 간발의 차이로 형과 아우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동생 야곱은 엄마의 태에서 형이 된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연이어 나왔습니다. 야곱은 동생으로 태어난 것을 평생의 한(恨)처럼 생각하며 살았고, 결국은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장자권을 가로챘습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장자로서의 위치가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형수취사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이라고도 하는데 장남이 자식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을 하여 일단 자식을 나아 준 뒤에 또 다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 정도로 엄격한 장자법이 있음에도 왜 야곱의 네 번째 아들 유다가 제일 먼저 땅을 분배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장자인 르우벤은 요단 동쪽의 땅을 미리 분배 받았기 때문에 제외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는 시므온이 있고 삼남으로는 레위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제일 먼저 땅을 분배받고 있습니다. 저도 저의 집안의 네 번째 아들이라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유다는 뭐가 잘났습니까? 유다는 왜 이런 특혜를 받습니까?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하나로 대답을 하자면 ‘그는 특혜는 받았지만 잘 난 것은 없다.’입니다.

그가 그렇게 잘 난 것도 없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어떻게 보면 치명적인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에게 있어 가장 큰 실수는 며느리와 동침한 사건입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며느리인지 몰랐고 또 며느리가 변장을 하고 그를 의도적으로 유혹했기 때문에 그로서는 당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유다 집안에 일어났던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앞서 말한 계대결혼법(繼代結婚法)은 유다 집안에 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큰 아들을 다말이라는 여자와 결혼을 시켰는데 그만 안타깝게도 자식을 낳지 못하고 아들이 죽었습니다. 당시의 법대로 유다는 둘째아들에게 형의 자손을 잇도록 형수인 다말에게 보냈는데 이 둘째 아들이 자식을 낳아도 자기 자식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피임할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악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둘째 아들의 생명도 거두어가십니다. 유다는 며느리를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들과 동침을 시키면 얼마 안가서 죽어버리니 이 여자를 남자 죽이는 여자로 생각했는가 봅니다. 유다에게는 막내 아직 어리다는 구실로 며느리에게 보내지 않고  며느리를 막내가 클 때까지 친정에 가 있으라면서 보내버립니다. 그러나 막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자신의 며느리를 다시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실 유다는 자신들의 아들의 범죄는 생각하지 않고 며느리 잘못 들어온 탓만 한 것입니다. 집안 말아먹고 집안의 씨를 말려버릴 정말 재수 없는 여자가 며느리로 들어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아버지의 부름만을 기다리던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부당하게 대우를 하고 있음을 알고 시아버지가 자신의 친정 가까이로 볼 일 보러 온 기회에 변장을 하고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결국 시아버지의 아들을 낳아 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이 유다 집안 어떻습니까? 거룩한 구석이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집안입니다. 가정사에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치명적인 내력을 지닌 집안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지금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왜 이런 사람도 이렇게 대우받게 해 주십니까?



하나님의 이런 속성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있는 근거입니다.

성도 여러분, 장자가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다윗도 형제 중 막내였습니다. 솔로몬도 서열로 따지자면 10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이전에 생각하기도 싫은 큰 실수를 했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여러분의 이력 때문에 주실 은혜를 거두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셨으면 우리를 고쳐서라도 복을 주십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가운데 떳떳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전에 ‘삼 대 부자 없고 삼 대 거지 없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족보를 따져 생각해 보면 지금 그럴싸한 사람도 삼 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상놈 집안 일 수 있고 또 거지같은 집도 삼 대만 올라가면 정승 집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 요사이 같은 시대에 삼 대까지 갈 필요 있나요? 자신의 당대에서 온갖 이력,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이런 실수 저런 실수를 하면 사는 것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앞으로가 중요한 것입니다. 유다와 다른 아들들의 차이점이 있다면 뭔지 아십니까? 이거 별 차이가 아닌 것 같아도 큰 차이가 될 수 있습니다. 유다는 나중에 자신의 며느리가 임신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끌어내어 불살라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며느리가 잉태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 것을 알고는 곧 바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합니다.

창38:26에서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고백합니다.

실수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는 영적인 패배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영적인 성숙의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 별 수 없다.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다녀도 별 것 아니다. 저는 저의 아버지를 대단하게 보았습니다. 물론 대단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의 어머니가 저의 아버지의 실수에 대해서 자식들에게 말하지 않으시니 몰랐습니다. 하지만 세상사에서 따져보면 저의 아버지 때의 어른들에게 그건 실수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집안사를 하나씩 알아가게 되면서 그렇게 대단하게 보였던 아버지가 내가 아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가 나이 사십대 후반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시더니 교회의 장로의 직분까지 받으셨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대단한 가문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의 아버님이 많이 아프십니다. 가까이 있어 제가 자주 뵙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래서 요사이는 매일 아버지께 전화를 합니다. 그리고 제가 전화로 기도를 해 드리면 마치 아이처럼 아멘 하시면서 고맙다면 말끝을 흐립니다. 제가 마음이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정말 많이 아프지만 영적인 면을 계속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복 받으신 분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제 자신에 대해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그 목사님이 그렇게 자신의 생을 마감하실 목사님이 분명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람 알 수 없더라고요! 저의 친한 동기생 목사님 한 분이 교회에 중직자들과의 관계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 부흥하던 교회가 점점 힘을 잃더니 급기야 교역자 생활비도 받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 중직들이 교회 살림 내몰라라 하고는 목사님께 교회에서 지출 할 것이 다 지출하고 남는 것이 있으면 목사님 알아서 써라 하더랍니다. 그때 당시에 솔직한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 하는데 교회 봉고차를 몰고 볼 일이 있어 어디를 나가면 순간순간 눈 꼭 감고 엑스레터 좀 더 밟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 친구 그렇게 목회할 친구 아니었습니다. 부교역자로 있는 교회마다 칭찬이 자자했던 목사였고 담임으로 가기 전 큰 교회 부목사로 있으면서 정말 인정받았던 목사입니다.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말이 정말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내가 너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나 우스운 일일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때에 다른 나머지 세 손가락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그 사람을 용서하고 받으셨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정죄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행11:9)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적용시켜야 합니다. 즉 내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정죄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으로 잡힌 여인에게 다가 가셔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요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을 정죄하고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이 갑자기 왜 태도가 돌변하여 다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주님이 ‘죄 없는 사람이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말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유다와 같은 자도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 나라의 귀한 재목이 되게 하십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패배주의에서 벗어납시다. 영적인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돌파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보호막을 감사합시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 바로 이 땅에서 유다에게 분배해 주신 땅의 지경(경계)은 어느 곳입니까?

1절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 극남단은 에돔 지경에 이르고 또 남으로 신 광야까지라 ”

경계를 어떻게 주셨는가 하면 제일 남쪽은 에돔이고 또 다른 남단은 신광야입니다. 이어서 읽어 가면 남편 경계는 염해의 극단입니다.(2절) 염해는 사해(死海), 죽음의 바다입니다. 동편도 염해가 경계이고(5~6절), 북쪽으로 올라가면 아골 골짜기,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이고(7~8절), 서편 끝은 지중해(10~12절)입니다.

에돔, 신광야, 사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넵도아 샘물, 바다... 이런 곳이 유다가 받은 동서남북 경계입니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서쪽은 지중해, 동쪽은 요단강 하구로 시작하는 사해입니다. 바다와 강과 물로 사방을 막아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유다에게 세상과는 격리된 지경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경계는 답답한 감옥 창살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막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각에 달려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되는 일이 없어, 이걸 해도 막히고 저걸 해도 막히고…” 그렇습니까? 그것이 신앙 밖의 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일부러 하나님이 보호막을 쳐 놓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안에서 살라고 하신 것인데 밖을 보면서 밖의 일을 도모하면 당연히 막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 인줄 믿으셔야 합니다. 그렇게 좋은 것도 없이 보이는 땅입니다. 그래도 그 땅이 바로 축복의 땅입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자란 사람은 세상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체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는 그 체험이란 것이 엄밀히 말하면 때로는 하나님의 징계일 때가 많습니다. 진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체험을 해야지 징계의 상처를 많이 경험하고 그것을 체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전과자라고 자랑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로는 모르고 사는 것이 복입니다. 알 필요가 없는 것은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냥 내가 해야 할 일만 놓치지 않고 꼭 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성수해야 하는 것, 어릴 때부터 몸에 베이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학교공부 이런 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 익숙해 있다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다 알고 나면, 믿음을 지켜 당연히 해야 하는 것도 괜히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주일이 한 주 동안 돈 번다고 바빠서 하지 못했던 일을 하기 위해 있는 날이 아닙니다. 주일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주일을 자신을 위해 이용해 먹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일에 이용을 당해야 합니다. 즉 주일은 정말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 날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정 따라 주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주일에 자신의 일정을 맞춰가야 하는 것입니다.

금년은 일년에 음력으로 입춘이 두 번 든다는 쌍춘년에다 오늘은 대 길일(吉日)과 겹치는 날이라 예식장마다 예약이 다 차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미리 시간을 잡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오전 10시도 예약을 받았다고 합니다. 또 내년은 600년 만에 한 번 돌아오는 황금 돼지해라서 내년에 태어나는 아이는 재물 복을 갖고 태어난다며 금년 가을에 결혼을 서두른다고 합니다. 오늘 예배 마치고 곧 바로 예식장 몇 군데를 뛰어야 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분은 그래도 좀 낫습니다. 그런데 결혼식만 있으면 “내 집 결혼식에 와 줬는데 어떻게 안 가 줄 수 있나? 이것도 다 품앗이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일에는 그렇게 예의를 잘 지키려 하면서 하나님께 지킬 예에는 그렇게 무른지 모르겠습니다.





3. 하나님만을 구하며 삽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유다 지파와 같은 경계를 가진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 비해서 볼 때 그렇게 멋져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장막 속에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유다에 비해 이미 앞서 분배를 받은 르우벤, 므갓, 므낫세 반 지파는 정말 좋은 땅을 받았습니다. 모든 나라가 다 흠모하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지파는 가나안을 다 정복하기도 전, 하나님의 약속의 땅도 아니었는데 요단 동편의 땅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세상이 다 흠모하는 땅은 세상이 가만 놔두지를 않습니다. 결국 그 땅은 그 주위에 있는 다른 나라의 표적이 되고 그 땅은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땅은 도망을 가려고 해도 동으로 가면 사해 바다에서 죽고, 남으로 가면 광야에서 헤매다가 죽고, 서로 가면 지중해 바다에서 죽도록 만들어 두십니다. 도대체 구멍하나 남기지 않고 다 막아버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늘을 보고 살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미 광야의 훈련에서 그들이 철저하게 받았던 훈련입니다. 광야는 다른 곳이 아닙니다. 의지할 그 어떤 것도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르우벤처럼 갓처럼, 므낫세 반지파처럼 세상의 화려함이 있는 것이 축복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막아놓으시고, 귀로는 책망을 듣게 하시고, 눈은 주를 향하여 말씀을 듣고, 의인의 공동체에 속하게 하신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왜 입니까. 그곳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질 곳이기 때문입니다.  - 아 멘 -(200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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